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얽히고 설킨 두산그룹의 4세 경영권 레이스

얽히고 설킨 두산그룹의 4세 경영권 레이스
형제들에 의한 집단경영체제, 4세에서도 이어질지 관심

두산그룹이 4세 경영체제로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경영권 향배와 형제들에 의한 지분분할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두산그룹 오너진영 4세들의 경영 전면배치가 두드러지고 있다. 4세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아직 경영전권 이양을 운운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빠르다는 반론이 우세하지만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내부 경쟁체제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두산그룹이 향후 경영체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와 같이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4세 가운데 경영전권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탄생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두산그룹의 경영체제는 여느 그룹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박승직 창업주에 이어 경영권을 물려받은 고 박두병 회장 시절엔 1인 경영체제가 확고했다. 3세에 이르러서도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장남 승계 원칙에 따른 전통적인 경영체제가 이어지는 듯 했다.

형제에 의한 집단경영체제

그러나 박 명예회장이 지난 96년 그룹회장직에서 물러나 손아래 동생인 박용오 회장에게 경영전권을 넘긴 이후 1인 경영체제는 변화를 가져왔다. 즉 박용오 회장이 그룹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는 명목상일 뿐 형제들이 각 계열사의 최고경영자로 독립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한편 계열분리를 하지 않는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두산그룹의 오너 일가인 박용오 회장의 형제는 모두 6남1녀. 이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형제는 모두 4명이다.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해 박용오 그룹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만 두산 사장 등이 그들이다. 여기서 박용곤 명예회장은 실질적인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박용오 회장을 중심으로 두 형제가 그룹경영에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경영체제에 대해 재계 관계자들이 집단경영체제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룹회장이 존재하지만 형제들에 의한 독립경영, 그렇다고 계열분리는 하지 않은 독특한 경영구조가 두산그룹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두산그룹 3형제에 의한 집단경영체제는 지난 90년 두산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페놀사건 당시 굳어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당시 두산은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그룹회장직을, 차남인 박용오 그룹회장이 그룹부회장을,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기획실장직을 맡아 3형제 협의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같은 3형제 협의체제는 페놀사건으로 박용곤 당시 그룹회장이 물러나면서 깨지는 듯 했지만 5남 박용만 사장이 성장, 경영인 대열에 합류하면서 박용오-용성-용만 3형제 체제로 복귀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형제간의 경영권 수평이동

두산그룹이 형제 협의체제에 의해 그룹경영을 할 수 있는 데에는 박두병 선대회장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박 선대회장은 기업과 가정에서 유난히 인화를 강조했다. 형제간 분쟁없이 1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목한 기업경영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이 같은 선대의 유지와 관련이 있다.
때문에 그룹경영권이 대를 잇는 게 아니라 형제간에 수평적으로 이양되는 사례가 흔치 않은 우리 기업사에서 두산그룹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 역시 이에 따르고 있다. 물론 SK그룹과 금호그룹의 사례가 없진 않다. 그러나 SK의 경우 갑작스런 형의 사망으로 나이어린 조카를 대신해 아우가 그룹경영권을 넘겨받았을 뿐이다. 금호그룹 역시 경영에 큰 뜻이 없는 형이 물려받았던 경영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동생에게 물려줌으로써 선친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했던 게 더 강했다.
그러나 두산의 경우 이들 그룹과는 달리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아우에게 물려주는 한편 아우들과 함께 집단경영체제를 갖추면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례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4세대가 넘겨받을 두산그룹의 경영권 역시 현재와 같은 집단경영체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2세 혹은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겪어야 했던 계열분리라는 과정을 겪지 않고 4세에서도 독립경영을 기반으로 한 집단체제, 즉 두산그룹이라는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박정원
(주)두산 상사부문 사장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
박진원
(주)두산 상무

4세대 경영체제 관심

그러나 일부에서는 계열분리를 하겠지만 그룹의 틀이 유지되면서 4세 가운데 1명은 황태자로 책봉을 받아 그룹경영의 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현재의 집단경영체제는 형제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촌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분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촌으로까지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라며 자칫 사촌들간의 경영권 분쟁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도 내놓는다.
두산그룹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4세들은 모두 9명.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오너 일가의 장자인 박정원 (주)두산 상사부문 사장과 친동생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차남인 박용오 그룹회장의 장남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과 차남 박중원 두산산업개발 경영지원본부 상무,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 (주)두산 상무와 차남인 박석원 두산중공업 차장, 그룹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4남 박용현씨의 장남 박태원 네오플럭스 상무와 차남인 박형원 (주)두산 차장, 그리고 3남인 박인원 (주)두산 과장 등이 그들이다. 모두 5명의 4세들이 두산그룹의 임원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차기 두산그룹의 경영대권 경쟁에 유력하게 거론되는 4세는 박정원 사장과 박경원 회장, 그리고 박진원 상무.
박 사장은 고 박승직 창업주-고 박두병 회장-박용곤 명예회장-박정원 사장으로 이어지는 두산그룹 로열패밀리의 장자로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올라있다. 장자승계의 원칙이 지켜진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박 사장이 그룹회장직을 거머쥘 수 있다.

재계 최초의 4세 최고경영자

지난 2001년 재계 사상 처음으로 4세 최고경영자 시대를 연 박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85년 두산실업(현 두산상사) 사원으로 그룹경영에 첫발을 내딛었다. 93년 동양맥주(현 OB맥주)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 사장은 부장·이사대우·상무로 승진했으며 99년 12월부터 두산 부사장으로 착실한 경영수업을 받아 사장에 올랐다. 사원부터 시작해 직급을 빠뜨리지 않고 경험한다는 두산그룹의 후계자 수업 원칙을 박 사장도 그대로 밟은 것이다.
특히 두산그룹은 집안내 서열을 중시하는 가풍이 이어지고 있어 4세 경영체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될 경우 두산그룹의 회장은 단연 박 사장의 몫이 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박 사장의 경영대권 행보에서 최대 경쟁자로 예상되는 4세는 박용오 그룹회장의 장남인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이 꼽히고 있다.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박 회장은 두산상사 입사를 시작으로 그룹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두산건설 영업본부 상무로 근무하다 지난 2002년 3월 코스닥 등록기업인 전신전자를 인수해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최근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돼 대권 레이스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몰려있다. 지난 2001년 4월 부도가 난 (주)이룸(현 케이아이티브)이 경영정상화를 위해 유상증자와 별정통신업체인 제니시스멀티미디어(현 잇츠티브)의 인수를 앞두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차명계좌를 개설, 이룸의 주식을 매입해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박 회장은 당시 이룸이 인수에 나선 제니시스멀티미디어 회장으로 미공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지난 6월21일 박 회장과 현직 변호사 박모씨가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의해 약식 기소돼 벌금 2천만원을 냈다.
이 사건은 재벌 4세와 현직 변호사의 부당 내부거래라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특히 그 수법이 전형적인 재벌일가의 모럴 해저드를 보여줘 강도는 더했다.
이와 함께 박 회장이 두산그룹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전신전자 경영에 매달려 있다는 점도 대권 레이스에서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너일가라 해서 외부의 경영인을 그룹회장으로 영입한다는 게 전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박진원,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

박 사장과 박 회장의 양자 대결로 진행되던 두산그룹의 4세 경영권의 향방이 이처럼 박 회장의 불미스런 사건 연루와 두산그룹에서의 독립경영 등으로 대오 이탈이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박진원 상무가 급부상하고 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인 박 상무는 최근 (주)두산 전략기획본부 TRI-C팀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 그룹경영권을 넘보고 있다. 특히 박 상무는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주)두산의 인사와 재무 등을 총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환위기 때부터 그룹의 구조조정을 사실상 진두지휘해온 핵심 조직인 전략기획본부 TRI-C팀을 맡고 있어 박 사장과의 경영권 레이스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박경원 회장이 부당 내부정보에 의한 주식 매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시점에 발표된 박 상무의 승진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보성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수료한 박 상무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재계에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두산의 구조조정을 실무적으로 진두지휘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때문에 재계 관계자들은 박 사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박 상무를 지목하고 있다. 그룹 내부에서도 박 상무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향후 두산그룹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4세의 경영권 승계 차원에서 박 상무의 향후 역할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아직 두산그룹 경영권의 형태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또 장자인 박정원 사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박정원-지원-진원 삼각편대

현재와 같은 형제들에 의한 집단경영체제가 굳어질 경우 두산그룹의 향후 경영권은 박정원 사장-박지원 부사장-박진원 상무로 연결되는 3형제 체제가 지배적인 관측이다. 현재 60대의 박용오 회장-박용성 회장-박용만 사장 체제의 삼각편대가 4세대에 이르러서는 이들 3명의 형제들에게 이양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 일부에서는 차세대 경영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박용성 회장의 가족이 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즉 박용성 회장과 박진원 상무에 의해 두산중공업이 계열분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산그룹은 형제들 간의 지분관계가 다소 복잡한 데다 IMF 관리체제를 거치면서 9개 계열사가 한꺼번에 (주)두산으로 합병되는 등 사업부문까지 얽혀있어 교통정리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칫 현대그룹과 같은 ‘왕자의 난’까지도 충분히 예견된다는 것이다.
4세 체제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향후 경영권 향배와 형제들에 의한 계열분리가 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4탄> 삼성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4탄> 삼성그룹
인위적인 결혼에 의한 혼맥보다 사돈의 사돈으로 연결된 혼맥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재벌로 삼성그룹을 꼽는 데 주저하거나 이견을 내놓을 이들은 아무도 없다. 90년대말까지 매출액 기준으로 수위를 차지하며 재계를 이끌었던 현대그룹의 몰락 이후 삼성그룹은 2000년 1위 자리를 탈환하며 재계가 아닌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그룹을 빼놓고선 한국경제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대한 거미줄 혼맥도

그룹의 덩치도 덩치지만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유무형의 자산과 파워는 이미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국제적인 상표가 되어 있는 한편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삼성의 흔적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삼성의 독주란 재계의 시샘어린 말이 나올만 하다.
세계 지도를 놓고 대한민국 서울 태평로의 삼성본관을 기점으로 전세계에 산재한 삼성의 해외 지사·공장·지점 등을 하나의 선으로 그려보면 마치 부채살과 같은 촘촘한 거미줄 그림이 그려진다.
생산과 영업, 그리고 관리로 대표되는 삼성의 이 같은 거미줄은 혼맥도에 그대로 옮겨진다. 국내 최고의 재벌답게 혼맥도 역시 재계와 정계, 그리고 관계와 언론계에까지 국내의 거의 모든 재벌과 권문세가를 포괄하며 방대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는 타 그룹과 달리 삼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인위적인 사돈관계라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과 법무장관·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를 화려하고도 방대하게 거미줄화 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1910년 경남 의령군 정곡면에서 경주이씨 문중의 부친 찬우씨와 안동권씨 문중의 모친 재림씨 사이에서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부친이 정해준 박두을씨와 결혼했다. 박씨는 순천박씨로 조선 초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이다.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
구인회 LG 창업주
노신영 전 국무총리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의인물용 용인물의’

청과물 판매상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삼성그룹을 키워낸 이 창업주의 창업과정과 숱한 일화들은 그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반에 소개됐다. 특히 최근에는 MBC TV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이를 드라마로 방영하고 있어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 창업주와 다른 경영인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천부적인 투시력과 재능을 갖춘 사업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정보수집과 분석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용병술에 있어서도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용병술과 관련 1938년 대구 견동에서 첫 사업으로 삼성상회를 경영할 때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1년 후부터 지배인이었던 이순근씨에게 인감과 수표책을 모두 맡겼던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모든 것을 위임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스타일, 즉 부하직원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이 같은 용병술은 이 창업주가 경영에서 손을 뗄 때까지 지속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면접 때 장안에서 제일 가는 관상가를 옆에 앉혀 놓고 응시자들의 인성을 자기 나름대로 평가, 당락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때문에 ‘이병철 경영철학’의 중심사상이 ‘의인물용 용인물의(擬人勿用 用人勿疑):의심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창업주는 뛰어난 정보수집가였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완벽한 정보수집을 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8년 삼성상회를 열어 건어물·청과물을 취급하는 무역업을 하기로 결정내리기 전에 이 창업주는 2개월 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베이징, 상하이를 여행하면서 적합한 업종선택에 고심했다. 또 반도체 사업 시작 전에는 도쿄와 미국 실리콘밸리에 정보센터를 설립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하며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이 과정을 거쳐 사업결정을 내리면 그는 또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하며 밀어붙였다. 이때 이 창업주는 사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68년 사돈기업이었던 LG가 독점하다시피 한 전자부문에 삼성이 진출, 두 집안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이 창업주는 사돈이었던 LG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구인회 창업주와 약속했지만 산업의 조류를 살피던 그는 전자·전기산업과 나아가 반도체사업에 승부를 걸지 않을 경우 삼성이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사돈들 대부분 그룹경영에 참여

국내 재계의 쌍벽이었던 이 창업주와 구 창업주는 10대 초반 함께 진주 지수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친분을 쌓은 죽마고우로 사돈까지 됐다.
이 창업주는 부인 박두을씨와의 사이에 3남4녀를 포함해 모두 4남6녀를 두었다.
장남으로 한때 삼성그룹 대권을 물려받았으나 물러나 현재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맹희씨는 1958년 손영기 농림부 양정국장의 딸 복남씨와 결혼했다. 손영기씨는 이후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다 1961년 당시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사장으로 영입됐으나 1976년 타계했다.
이 창업주의 맏며느리 손복남씨는 한때 안국화재 최대주주로 상무이사 직함을 가지고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CJ(주) 대표이사 회장인 손경식씨는 손복남씨의 동생이며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아들이다. 즉 맹희씨 일가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해 CJ그룹을 독자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맹희씨는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삼성물산, 미풍산업,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쌓았다. 이에 차기 대권은 당연히 장남인 맹희씨에게 넘어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 창업주는 1971년 ‘경영능력’을 이유로 맹희씨를 그룹경영에서 퇴출시키고 만다.
맹희씨는 2남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맞았다.
차남인 창희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만난 아이치현 출신인 일본인 여성 나카네 히로미씨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23년만인 1986년 이영자라는 한국이름으로 개명했다. 이씨의 부친은 일본 미츠이물산에서 중역으로 일했던 나카네 쇼지씨로 알려졌다.
창희씨는 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으로 삼성그룹을 떠나 1973년 설립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사와 1977년 인수한 특수세라믹사를 통합하여 새한미디어를 설립, 독자운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백혈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1991년 7월 미국에서 치료중 별세했다.
창희씨 사망 이후 부인 이영자씨는 새한그룹 회장으로 취임, 장남 이재관씨와 경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회장으로까지 승진하며 새한그룹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이재관씨가 분식회계를 통해 1천억원대의 불법대출을 받아 구속돼 경영권을 상실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영자씨도 경영에서 손을 뗐다.

“건희에 비해 너무 큰 키 아니냐”

두 형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대권을 거머쥔 3남 건희씨는 법무장관·내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나희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부친이 서로 의기투합, 사돈을 맺자는 합의 아래 추진돼 성사됐다.
이병철-홍진기 두 사람의 교분은 4·19 후 고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돼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시작됐다.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산 전 국무총리 신현확씨가 이 창업주에게 고 홍 회장을 천거하자 이 창업주가 형무소로 면회가고, 또 집으로 찾아가 가족들을 위로한 게 인연이 됐다. 고 홍 회장은 출감 후 삼성에 몸담아 1965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을 개국하면서 경영을 맡았다.
이 회장과 부인 홍나희씨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첫 대면한 뒤 7개월 후인 1967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 회장의 모친인 박두을씨는 홍나희씨를 처음 보고 “건희 키(1백68cm)에 비해 너무 큰 키(1백65cm) 아니냐”며 걱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어머니를 닮아 손자손녀들의 키가 큰 것을 보고 “2세를 위해 큰 여자가 괜찮다는 건희 말이 맞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의 혼맥도는 바야흐로 거미줄망을 형성하게 된 계기를 맞는다. 이 회장의 처가인 홍진기 가문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과 사돈을 맺고 있다. 또 노 전 총리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사돈을 맺고 있어 이병철 가문은 현대 정주영 가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회장의 자녀는 1남3녀.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장남 재용씨는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세령씨를 부인으로 맞았다(본보 443호 ‘대상그룹과 임대홍 창업주’ 편 참조). 또 차녀 서현씨는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 재열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은 중앙일보에 이어 동아일보와도 사돈을 맺게 됐다.

엘리트 사위들

이 창업주의 맏딸인 인희씨는 고려병원(현 삼성강북병원) 고문을 지낸 조운해씨와 결혼했다. 그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의사출신이다.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했다. 당시 이들의 결혼을 두고 “한국 재계의 쌍두마차인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는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의 전자부문 진출로 LG와 불협화음이 일자 양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도 했다.
셋째딸 순희씨는 남편과 이혼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이 창업주가 애틋하게 여겼다는 넷째딸 덕희씨는 이정재씨의 아들 종기씨와 결혼했다. 이종기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중앙일보 사장을 거쳐 제일제당 부회장과 삼성화재 회장을 역임했다.
다섯째딸 명희씨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현재 조선호텔 회장으로 재직중인 정재은씨는 삼성그룹 경영에 깊숙이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엘리트였다.
명희씨의 장남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은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해 한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최근 이혼했다.
이 창업주는 이들 자녀 외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태휘씨와 6녀 혜자씨가 있지만 모두 일본인과 결혼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다만 태휘씨는 일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이 창업주 생존시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제일제당 상무까지 지냈지만 부친 별세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빌딩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난세의 지혜, 혼사에 반영

이처럼 이 창업주의 4남6녀 자녀들의 혼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권세가는 생각보다 적다. 이는 이 창업주의 평소 생활철학 혹은 처세학이 만들어낸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사업을 시작해 일제의 멸망까지 목격한 후 한국전쟁과 4.19, 자유당 몰락, 5.16 등 숱한 풍상을 겪는 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과는 지나치게 가깝지도, 지나치게 멀지도 않은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난세를 사는 지혜를 터득해 이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창업주 가문에서는 정계와 재계, 관계와 언론계 등 내노라 하는 권세가가 모두 등장한다. 이 창업주 스스로 이를 만들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권문세가와의 통혼이 이뤄졌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창업주 가문의 혼맥도를 살펴보면 구인회가와 홍진기가를 거쳐 사돈의 사돈을 따지다보면 무려 50여 개의 권문세가들이 이병철가의 혼맥도 하나에 집대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돈의 사돈이 직접 이병철가와 사돈을 맺는 경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창업주의 차녀 숙희씨가 구인회가로 출가한 이후의 혼맥도에서 구인회→허정구→김동조→정주영→노신영→홍진기→이병철가로 이어지는 순환형태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두 명의 대통령이 이병철가 혼맥에서 등장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섯 다리를,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네 다리를 건너면 사돈으로 연결된다.

혼맥도 단골 김복동, 삼성 혼맥에도 등장

재계 혼맥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몇몇 가문은 이병철가에서도 어김없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들은 많은 가지를 내놓고 재벌가문의 혼맥도의 동맥역할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즉 여기저기 널린 여러 가문들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이병철가를 비롯해 김복동 전 육사교장,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송인상 효성 고문,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홍진기 전 재무장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김복동 전 육사 교장은 김한수 한일합섬 창업주의 4남 중산씨와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의 2남 흥구씨를 사위로 맞았고, 그의 여동생 옥숙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숙씨는 금진호 전 상공장관에게 출가해 혼맥도에서 등장 빈도가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사돈가인 김한수가와 강성진가는 다같이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과 통혼하고 있다. 따라서 김복동가의 혼맥도에서 삼성은 물론 LG, 현대, SK, 두산 등 재계 인사들의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어쨌든 삼성그룹은 2대 이건희 회장에 이어 3대로의 경영대물림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창 진행중이다.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의 후계구도를 뒤집을 만큼은 아니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관측이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3탄> 신동방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3탄> 신동방그룹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련 의혹 끊이지 않아


노태우 전 대통령
천병규 전 재무장관
송인상 효성그룹 고문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화려한 등장, 초라한 퇴장.’
신동방 오너 일가의 최근 근황에 대한 재계의 반응은 이 같은 표현으로 압축된다. ‘해표식용유’로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오른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한때 승승장구하며 재계의 부러움을 샀다. 각종 특혜설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치지형에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지 않은 채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했다. 대통령이었던 사돈이 권좌에서 물러난 지 불과 6년6개월만에 신동방은 부정과 비리의 온상기업으로 전락하며 오너 일가도 사돈처럼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이어받지 못한 창업주의 철학

신동방은 지난 1996년 사명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동방유량으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기업이었다. ‘해표식용유’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오너 일가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사돈’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창업주 고 신덕균 전 명예회장과 신명수 전 회장은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나 있었다.
신 전 회장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IMF 관리체제 초기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였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매일 각종 매스컴을 장식했다.
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신동방의 오너 일가가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신덕균 창업주의 생활신조가 큰 몫을 했다. 그의 아호는 ‘눌원(訥園)’.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訥園而敏於行)’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왔다. 아호에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신 창업주는 국내 대두가공업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해방전 정미업과 미곡유통을 했던 그는 아직 식품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1966년 동방유량을 설립하고 식용유 생산 및 사료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 사업 하나에 평생을 쏟으며 오로지 식품산업 한 길을 걸어왔다. 흔히 재벌을 향해 쏟아지는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난에서 신 창업주만큼은 예외였다.
식용유 및 대두박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신 창업주는 업종전문화로 승부수를 띄워 꾸준한 성장을 지속했다.

어려움 없었던 창업

이 같은 외고집 경영은 1989년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초기까지는 그대로 유지가 됐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IMF 관리체제를 앞두고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꾀하다 2년만에 워크아웃에 들어가 결국 올해초 채권단에 의해 CJ컨소시엄에 매각돼 오너 일가는 재계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다.
신 창업주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기 한 해 전인 1909년 경상남도 창원군 천가면 동선리(현재 부산광역시에 편입)에서 부친 신태규씨와 모친 조선이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태규씨는 집안의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에 따라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마치면서부터 선대에서부터 가업으로 전해내려온 수산업에 종사, 유복한 집안이었다.
유교적 가풍에 따라 유년시절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수업을 받은 신 창업주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범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어 서울의 경신고보에 진학, 유학생활을 하게 된 신 창업주는 이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독립심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당시 오산학교와 더불어 이북 출신 학생이 많고 진보적인 교육을 가르쳤던 경신고보에서 그는 춘원 이광수로부터 영어, 육당 최남선과 이선근으로부터 역사, 조선어학회 이사장 장지영으로부터 한글 철자법 등을 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한 신 창업주는 동경 유학시절 일본의 조선 수탈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졸업후 고향에서 민족자본 형성을 모색했다.
그리고 1년 후 마산항에 정박중인 일본 화물선을 지켜보다 곡물사업을 해보기로 결심을 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곡물거래를 겸한 정미업이 사업적으로 유망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정미소로 시작해 식용유로 성공

부친으로부터 결혼을 조건으로 사업자금을 받은 신 창업주는 친지의 중매로 1935년 경남 동래군 구포에서 정미업을 하던 재력가 김정환씨의 장녀 영자씨와 혼사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그의 일생에서 최초의 사업으로 정미소를 시작하게 된다. 현재 부산역 앞 텍사스 거리의 ‘태평정미소’가 그것이었다.
부친에게서 몸으로 배운 신용과 부지런함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태평정미소는 일이 많아졌고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세운 4~5년 뒤에는 부산지역에서 이름있는 청년사업가로 서서히 부상하게 됐다. 그 결과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부산정미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어 같은 시기에 곡물도매업 및 대규모 도정업과 수산업을 기초사업으로 오늘날 신동방의 모태가 된 동방흥업주식회사를 설립, 1963년에는 서울 진출과 함께 마포에 근대식 제분기를 설치하며 제분사업에도 본격 참여하게 된다.
식품 외길을 걸어온 신 창업주는 한때 철강업에 진출, 외도를 하기도 했다. 농림부 차관을 지내고 당대의 농정가였던 주석균씨로부터 동생인 주창균씨를 소개받은 게 계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 창업주는 철강사업에서 손을 떼고 만다. 철강사업 자체가 스스로 창안한 사업이 아닐뿐더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주씨를 도와주겠다는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씨의 자립기반이 어느 정도 생기면서 신 창업주는 과감하게 손을 떼고 식품산업만을 고집했다.
제분사업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던 신 창업주가 식용유지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64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민들 사이에서는 식용유라는 개념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유지를 식품가공의 기본 원료로 생각하기보다는 조미료의 일종으로 인식해 참깨와 들깨, 고추씨 등을 이용해 자가제조하거나 시장에서 파는 미강유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보다 전문적이고 위생적인 식용유를 생산, 판매하기로 작정한 신 창업주는 대전에 공장을 설립해 일본으로부터 반 연속 추출식 제유설비를 도입했다. 그리고 1966년 첫 제품을 생산했다. 오늘날 신동방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를 자랑하는 화려한 혼맥도

신 창업주의 자녀들은 자신과는 달리 대부분 연예결혼을 했다. 그리고 사돈들은 정관계 및 굴지의 재계 인사와 연결된 화려한 혼맥도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그룹총수와 전직 장관, 그리고 은행장 등이 등장한다.
먼저 신 창업주의 부인 김영자씨는 농림부 차관을 거쳐 대전피혁 회장과 효성기계공업 고문을 역임한 김종대씨의 누나다. 부산의 재력가 집안과 중매로 결혼한 것이다.
신 창업주의 자녀는 3남2녀로 장녀 현숙씨를 제외하면 모두 연애결혼을 했다.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현숙씨는 친지의 중매로 1959년 동방의료양행 회장인 남해용씨와 결혼했다. 해용씨는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졸업해 신 창업주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그의 부친은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한 남두현씨.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은 미국유학중 알게된 동양나이론 송인상 회장의 차녀 길자씨와 수년간의 연애 끝에 1968년 결혼했다. 신 전 회장은 1964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또 길자씨는 이화여대 음대 졸업 후 미국에서 첼로를 계속하다 신 전 회장을 만났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신 창업주 일가의 혼맥도는 이봉서 상공장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동서간이 됐다.
신 전 회장이 신동방에 입사한 것은 1967년. 신동방 설립 이듬해였다. 당초 기획실에 근무하며 진해공장 건설에 따른 제반 현안들을 입안하고 실무적으로 까다로운 업무들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년간 실무업무를 경험한 신 전 회장은 1974년 사장에 취임, 2세 경영인으로서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사 22년만인 1989년 신 창업주의 명예회장 취임과 함께 경영대권을 물려받았다.
신 전 회장은 취임 이후 곡물가공업을 전문분야로 동양 최고, 최대의 회사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감추지 않았다. 이는 부친과 같이 대기업의 전형적인 사업확장 방법인 문어발식 경영방식을 피하고 사업분야를 전문화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경영방법을 선택함으로써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겠다는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오래지 않아 이 같은 경영철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됨으로써 불행한 미래를 예고한다.

3세에 이르러 완성미 플러스

신 창업주의 차남 영수씨는 1970년 재무장관을 역임한 천병규씨의 1남3녀 가운데 셋째인 난주씨와 결혼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영수씨는 기업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현재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난주씨는 미국 워싱턴대학을 졸업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차녀 정숙씨는 지난 1980년대초 도미, 미국인 마이크 바세트씨와 결혼해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고려산업 회장으로 재직중인 3남 성수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남화진씨와 연애결혼했다. 화진씨의 부친은 재무차관을 역임한 뒤 중소기업은행장과 서울신탁은행장을 지낸 남상진씨. 성수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려산업에 입사, 경영자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신 창업주 일가의 화려한 혼맥도는 3세에 이르러 한층 그 빛을 발한다. 신 전 회장의 맏딸 정화씨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와 혼사를 치룬 게 대표적이다.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1987년 미팅에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만난 정화씨는 졸업을 앞둔 4학년 여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신 창업주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직계자녀들과 손녀에 이르는 3대의 혼사를 통해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정재계 인사들과 사돈을 맺어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신 창업주 자신의 결혼으로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가문을 통해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가, 동양나이론 회장인 송인가, 이봉서 전 상공장관의 부친인 전 국제화재 이필석 명예회장 가문, 전 내무장관 김치열가, 재무장관을 지낸 서봉균가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장녀 현숙씨를 통해 중앙일보를 창간한 홍진기가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가와 연결되고 차남 영수씨를 통해서는 법무장관을 역임한 오탁근가와 한 다리 건넌 사돈이 된다.
또 3남인 영수씨의 혼사로 1950년대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최정우가와 통하기도 한다.
손녀인 정화씨로는 노태우가와 연결되면서 SK그룹 최종현가와 김복동 전 국회의원 가문과 연결이 된다.

대통령의 사돈, 득이 아닌 해

그러나 화려한 정관계 인사와 재계 인사들을 사돈으로 두고 있는 신동방은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감으로써 기업은 살았지만 오너 일가는 퇴출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특히 대통령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특혜시비 속에 사업을 다각화했지만 결국은 사돈이 신동방의 몰락을 돕는 기이한 인연을 또 맺고 있다.
신 창업주에 이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신 전 회장은 식품전문기업으로서의 전문성을 포기한 채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92년 동방페레그린증권 설립을 시작으로 93년 해표유니레버 설립 등 증권, 유통, 외식, 화장품제조업 등에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 97년 대농그룹의 미도파에 인수를 시도하면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성원건설 등을 동원, 적대적 M&A에 나섰지만 전경련의 지원을 받은 대농의 방어로 실패하면서 급격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당시 신동방이 미도파와 대농 주식을 매집하는 데 쏟아부은 자금의 규모는 알려진 것만도 1천억원대, 우호세력까지 합하면 2천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막대한 주식매집 자금의 출처를 둘러싸고 비자금 의혹까지 불러진 가운데 결국 미도파 인수도 포기해야 했다.
이후 IMF 관리체제에 따른 고금리 소용돌이에 휘말려 1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신동방은 다시 회생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대한 특혜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증권업 진출이 대표적이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서울 소공동 서울센터 빌딩을 매입하고 테헤란로의 18층짜리 동남빌딩을 건축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99년 12월 신 전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및 업무상 배임, 증권거래법·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다.
결국 신동방은 채권단에 의해 지난해 8월 동원컨소시엄에 매각되는 듯 하다 올해초 CJ컨소시엄에 지분 56.28%가 매각됨으로써 신 창업주 일가는 신동방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2탄> 대상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2탄> 대상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처가 기업으로 유명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
이훈동 전남일보 명예회장
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조미료 전쟁 청산’, ‘영호남재벌의 화합’.
지난 1998년 6월9일 각종 매스컴에서는 한 결혼식을 두고 이같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정계와 재계 VIP들의 문전성시 속에 치러진 이날 결혼식의 주인공은 이재용 현 삼성전자 상무와 그의 부인인 임세령씨였다. ‘미풍’과 ‘미원’으로 대표됐던 국내 조미료 시장의 양대축 삼성그룹과 대상그룹(당시 미원그룹)의 3세들이기도 했다.

삼성 황태자와의 결혼

두 사람의 결혼을 계기로 대상그룹의 오너 일가는 각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철저히 외부노출을 꺼렸던 임창욱 명예회장도 장녀의 결혼식을 전후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다. 각종 여성지에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나희씨와 함께 임 명예회장의 부인 박현주씨 관련 기사도 줄을 이었다.
이에 당시 대상그룹의 한 관계자는 “마치 삼성그룹과 동일한 레벨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말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원’이라는 조미료 외에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던 대상그룹은 임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의 결혼으로 삼성그룹의 사돈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지금까지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상그룹 스스로도 이를 부담스러워하지만 삼성그룹 역시 다르지 않다. 좋은 일에 오르내리는 것은 별문제지만 궂은일에 사돈기업이라 토를 다는 데 대해 마뜩찮다는 반응이다.
국내 최고의 재벌그룹인 삼성그룹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재용 상무와 임세령씨의 결혼은 양가 어머니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알려진 홍나희씨와 박현주씨는 신앙생활을 통해 친분을 맺고 있었다. 또 임세령씨는 이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홍씨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세령씨를 눈여겨봐왔던 홍씨는 며느리감으로 세령씨를 점찍어 두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씨 역시 재용씨를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마치 의기투합이라도 하듯 사위와 며느리 삼기로 하고 아들딸의 결혼을 주선했다.
급기야 이들의 결혼이 발표되자 재계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쏟아졌고 그 관심도 어느 누구의 결혼 못지않을 만큼 집중됐다. 98년 6월8일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 앞 정원에서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치러진 결혼식에는 삼성과 대상그룹의 오너 및 전문경영인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 등 5백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병철 창업주의 기일에도 모두 한 자리에 모이지 못했던 한솔·신세계·제일제당(현 CJ그룹)·새한그룹의 오너 및 2~3세들이 대거 참석한 한편 당시 이수성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 김석원 쌍용양회회장, 유상부 포철회장, 이웅렬 코오롱회장 등이 하객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각종 가십거리를 쏟아냈다.

나서지 않은 경영스타일

그러나 대상그룹은 점차 매스컴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실 대상그룹은 ‘미원’이라는 상표 외에 딱히 일반에게 크게 알려진 기업이 아니었다. 때문에 결혼식 이후 관심의 대상에서 한발짝 비켜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상그룹의 창업주는 고 임대홍 전 명예회장. 그는 천성적으로 얼굴 내보이기를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청에도 드나들지 않았고 경제인 모임에 나가본 적도, 직책을 맡아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임씨문중의 중앙협의회격인 ‘임씨대동회’의 회장을 역임해 유일한 기업 외의 직함을 가졌을 뿐이다.
이 같은 창업주의 스타일은 장남으로 경영권을 물려받았던 임창욱 명예회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임 명예회장은 취임 후 부친과 달리 진취성과 능력을 중시하고 인간성을 강조하는 경영을 펼치며 보수성에서 탈피하고자 했지만 재계에서는 커다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대상그룹은 마치 ‘미원’이라는 조미료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상그룹의 안을 들여다보면 속이 꽉찬 알짜배기 기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상그룹은 1956년 조미료 전문기업으로 출발, 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조미료 및 종합식품사업을 기반으로 축산, 건설, 금융, 정보기술, 종합광고 등 각종 서비스 업종을 영위하고 있으며 13개 계열사에 17개 해외사업장을 거느리고 있다. 2003년 기준 1조9천4백17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97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고 그룹명을 ‘미원’에서 ‘대상’으로 변경하는 그룹 CI작업을 완료하고, 21세기 초일류기업으로 도약을 선언하기도 했다.
특히 IMF의 구제금융 지원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수익 사업인 라이신사업의 매각을 비롯하여 비주력 사업 및 한계사업의 매각 합병 등 혁신적인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단행,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타파하고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재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상그룹의 50여년에 걸친 역사는 대체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해 소개되고 있다.

‘미원’으로 시작되는 조미료 역사 창조

창업기로 일컬어지는 1950~ 60년대에는 국내 식품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시기다.
임대홍 창업주에 의해 시작된 대상의 역사는 순수 민족자본과 독자 기술로 생산된 국산 조미료 1호인 미원을 통해 우리 식품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60년대부터 조미료 대량생산 시대를 연 미생물 발효법 개발로 국내 조미료 시장에서 선두로 나섰으며, 전분 및 전분당, 구연산 등 관련 식품분야로 사업을 확대하여 종합식품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던 시기다.
1970년대는 도약기로 분류되고 있는데 국제화의 선도기업이 된 시기다.
국내 최초로 플랜트를 수출하여 인도네시아에 PT.MIWON INDONESIA Tbk를 설립하고 이어 일본, 미국, 홍콩 등 지역에 무역법인을 세워 국제화를 선도했다. 또한 중공업, 무역, 석유화학 등 비식품분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성장기인 1980~90년대는 미래를 준비하는 힘과 경쟁력을 다진 시기다.
제2대 임창욱 회장의 취임과 함께 육가공, 냉식, 커피, 건설 등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독창적인 기술축적을 위해 중앙연구소를 설립하여 R&D 투자에 집중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기술개발에 전력 질주했다.
또 90년대 들어 유통, 정보기술, 종합광고업 등 소프트 사업에 진출했으며 90년대 후반기에는 전문경영인 출신인 고두모 회장 취임과 그룹명을 대상으로 변경했다. 이때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구조 전문화 등의 구조조정을 통해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실속 챙기는 경영과 혼맥

대상그룹의 모기업인 대상(주)는 1956년 동아화성공업(주)을 모태로 출범했다. 조미료의 대명사인 ‘미원’을 시작으로 주력사업 분야인 종합식품, 발효, 전분당을 비롯해 건강, 건설, 무역사업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50여년간 축적한 발효기술을 핵심 기반으로 생명공학, 정밀화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99년 1조1천억원 매출에 3백63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양호한 경영실적을 이룬 대상은 98년말 3백22%에 달했던 부채비율이 2000년 현재 1백80%대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폐쇄적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오너들의 경영스타일과 달리 대상그룹은 실속을 차린 대표적인 기업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혼사도 그룹 규모에 비해 국내 굴지의 재벌 못지않은 화려한 가문과 연결된 혼맥도가 그려져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함과 함께 평범함이 또 보인다.
임 창업주는 1920년 전북 정읍에서 농부였던 부친 임종구씨와 모친 김순례씨 사이의 5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정읍군청에서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전북도청 직원으로 근무하던 1942년 박하경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인 박씨는 일제 때 전남에서 철도청 역원(현 임원급)으로 일했던 박기환씨의 딸이다.
임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이들 자녀의 혼사를 통해 임 창업주는 재계·금융계 인사와 사돈을 맺게 된다. 그러나 평범한 보통사람과도 통혼했다. 또 사돈들의 출신지는 서울·전남·부산 등으로 지역적 편중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혼으로 이룬 호남재벌의 결합

외동딸 경화씨는 동생 임창욱 명예회장 집에 가정교사로 드나들던 서울대 공대 출신의 김종의씨(백광산업 회장)와 혼사를 맺었다.
경남고 졸업후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미국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MBA를 마치고 그룹 경영에 참여, 미원통상 대표이사와 P.I미원 인도네시아 대표이사를 지냈다.
장남으로 부친에 이어 그룹대권을 물려받았던 임 명예회장은 1976년 집안사람의 중매로 금호그룹 창업주인 박인천씨의 3녀 현주씨와 결혼했다.
임 명예회장은 한양대·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화공을 전공했다. 귀국 후 1973년 미원에 입사해 미원종합개발·한남화학 사장을 역임했다. 부인 현주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한때 미국에 유학,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전북과 전남을 대표하는 재벌간 통혼으로 당시 화제가 됐다. 특히 이 결혼은 임 창업주 가문의 화려한 혼맥도에 시동을 건 계기가 됐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익기가를 지나 해태그룹 창업주인 박병규가, 교통장관을 역임한 민병권가와 차례로 연결된다. 또 방계로는 전 재무장관인 이정환가와 동양증권 사장을 지낸 정종만가와도 연결된다.
차남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은 1990년 4월 한국산업은행 부총재보를 역임한 손필영씨의 외동딸 성희씨와 결혼했다.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 유학시절 교회를 다니면 성희씨를 만나 교제후 결혼에 성공했다.
성희씨는 당시 산업은행 도쿄지점장이었던 부친을 따라 일본에 와 도쿄 세이징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처럼 2남1녀의 자녀로 연결되는 혼맥도는 단촐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5명이나 되는 임 창업주의 동생들과 그 자녀들로 이어지는 혼맥도는 정재계는 물론 의학계 등 다양한 인사들과 연결되고 있다.
임 창업주의 둘째 남동생 임채홍 전 내쇼날프라스틱 회장은 특히 화려한 사돈들을 자랑하고 있다. 대상그룹 부회장까지 역임하며 임 창업주와 함께 대상그룹을 일군 일등공신이기도 한 그는 1979년 대상에서 분가해 호남식품과 내쇼날프라스틱을 독자경영했다.
채홍씨의 부인은 장혜원씨로 3남2녀의 혼사를 통해 1981년 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가문과 연결했다. 장남 임익성 내쇼날프라스틱 회장의 부인이 고 전 부의장의 둘재딸 선영씨인 것이다. 또 차녀 현미씨는 1984년 이훈동 전남일보 명예회장의 막내아들 경일씨와 결혼했다.
첫째 남동생 정홍씨의 3남3녀 자녀를 통해서도 화려한 혼맥도를 그려나갔는데 차남 우성씨가 동일방직 사장을 지낸 정종화씨의 딸 혜경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셋째 남동생 수홍씨는 3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 병선씨가 전 법무차관 김영천씨 가문과 혼사를 맺었다.
유일한 여동생인 현흥씨는 임 창업주와 창업동지이며 대상그룹 고문을 역임한 한현석씨와 결혼했다. 또 MIT 출신인 막내 남동생 우홍씨는 대학동창인 브라질 출신의 테레사씨와 결혼,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톡톡 튀는 둘째딸 홈피, 삼성그룹 폭탄세례

한편 임창욱 명예회장은 두 딸만을 두고 있는데 장녀 세령씨의 동생 상민씨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뉴욕에서 유학중이다.
상민씨는 지난 4월 형부와 언니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부인 임세령씨의 사생활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면서 한바탕 유명세를 탔다. 커뮤니티 사이트인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를 개설, 운영하고 있는 상민씨가 조카인 이 상무 부부의 딸 원주양의 사진을 모두 공개해 버린 것이다.
특히 사진아래에 “요즘 제 생활의 활력소가 된 둘째 조카. 같은 공주라 그런지 정말 귀엽답니다. 호호호”라며 원주양을 소개한 한편 이 상무의 장남인 지호군에 대해서도 “언니와 형부를 반반씩 닮은 너무너무 사랑하는 조카”라며 “너무 잘생겨서 친구들이 탐낸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한국 50대 여성 부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던 상민씨는 “소호에서 20달러짜리 귀걸이를 깎아서 15달러에 샀다”며 좋아하거나 연예인들의 홈페이지 주소를 퍼놓는 등 지극히 평범하고 발랄한 유학생의 모습을 보여줘 재벌가 자녀라는 흔적은 홈페이지만으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상민씨의 홈피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원정출산 등 문제가 발생하자 사진을 모두 삭제했다.

한정곤 기자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1탄> 현대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1탄> 현대그룹
3세에 이르러 재계와 통혼, 쌍용그룹·LG그룹 가문과 연예결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한국경제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기업이 있다. 바로 현대그룹이다. 지금은 형제들간의 분가와 분리로 재계 서열상으로는 다소 밀려 있지만 이들이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그늘에 있었을 때만 해도 현대그룹은 삼성그룹과 재계 수위를 다퉜다.

형제간 뿔뿔이 흩어진 현대그룹

특히 개발경제 시절 현대그룹은 한국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경쟁관계였던 삼성그룹이 소비재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을 당시 현대그룹은 각종 국가 기간산업건설을 주도하며 인프라망을 형성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현대그룹이 역대 정권과의 불미스런 사건들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들어서도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려 당시 그룹회장이었던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이 자살하는 등 순탄치 않은 험로를 걸어왔다.
내부적으로도 고 정 명예회장 후계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불거져 나와 현대그룹 경영에 커다란 타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불협화음은 오늘날 형제간의 분할이라는 구도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혼맥은 여전히 창업주인 고 정주명 명예회장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의 현대그룹이 아니라 분리 이전의 현대그룹과 고 정 명예회장, 그리고 그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의 성장사와 함께 창업주인 고 정 명예회장의 기업인으로서의 삶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불과 30여년만에 국내 정상의 기업인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진면목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 정 명예회장은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부친 정봉식씨와 모친 한성실씨 사이에서 1915년 11월25일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이후 훌륭한 농군으로 만들겠다는 부친의 뜻을 거역한 채 3년 동안 네 번이나 가출을 시도, 결국 19살 늦은 봄 인천에서의 부두노동자로 외지생활을 시작했다. 농사품앗이, 건축공사장 인부, 공장견습공 등을 거쳐 마침내 쌀도매상인 부흥상회의 배달부로 서울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고 정 명예회장은 이 상회를 인수, 경일상회를 설립하고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Art)서비스를 설립, 훗날 현대토건사를 거쳐 오늘날 현대그룹의 기틀을 닦았다.(고 정 명예회장의 성공신화는 TV 등의 각종 매스컴과 출판물이 워낙 풍부한 탓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생략한다.)

자손 풍성한 다산(多産) 가문

고 정 명예회장의 집안은 여느 재벌그룹과는 달리 다산(多産) 가문으로 꼽힌다. 그의 형제들 뿐 아니라 자녀까지도 그 숫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해 현대그룹 성장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형제들인 인영·순영·상영씨 등은 일찌감치 분가해 별도의 그룹을 이루고 형과 함께 재벌총수의 대열에 나란히 서기도 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부도와 함께 현재는 그 명맥조차 찾기 힘든 그룹도 없지 않다.

군단 방불케 하는 대가족

첫째 동생인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53년 현대건설 입사 이후 20여년 동안을 형과 함께 하다 중동 진출 신중론으로 이견이 발생, 결국 한라그룹을 설립해 독립했다. 그러나 한라그룹은 IMF 직전 자금난을 겪으며 부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둘째 동생인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과 셋째 동생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넷째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도 1950년대 후반 현대그룹에 합류, 자신의 가산을 처분하는 등 형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특히 정세영 명예회장은 별명이 ‘포니 정’이었을 만큼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8남매로 형제들이 많았던 탓에 고 정 명예회장의 일가는 직계와 방계를 합할 경우 LG그룹 못지않은 대군단이 탄생하게 된다. 고 정 명예회장만도 8남1녀의 자녀를 두고 20명이 넘는 친손자(녀)를 두고 있다. 또 이들이 결혼해 맞이한 부인과 남편, 그리고 증손자(녀)까지 합하면 대가족이라는 표현 자체가 오히려 옹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일부 자녀들의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고 정 명예회장이 장수를 했던 탓에 사고로 동생과 자식을 앞세워야 했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중이었던 넷째 동생 신영씨를 1962년4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20년 뒤 4월에는 인천제철(현 INI스틸) 사장으로 재직중이었던 장남 몽필씨를 역시 교통사고로 잃었다. 8년 뒤 4월에는 넷째 아들 몽우씨가 또 자살로 사망함으로써 고 정 명예회장을 슬픔에 빠뜨렸다.
공교롭게도 고 정 명예회장을 앞서갔던 이들은 모두 4월에 변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8월 사망한 다섯째 아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 고 정 명예회장에게 교통사고와 자살은 떠올리기도 싫은 단어가 돼버렸다.

족벌경영 싫어했지만 동생 ·자녀 경영에 참여시켜

고 정 명예회장은 족벌경영이란 말을 무척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룹 경영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형제들이 각각 분가를 통해 빠져나가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2세들을 경영일선에 참여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장남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든 아들들을 경영에 참여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각자의 개성에 따른 역할분담이 확실했고, 이후 분가도 이에 따라 이뤄졌다.
이 같은 고 정 명예회장의 성품 탓이었을까. 국내 최대 재벌그룹의 혼맥도라고는 의아할 만큼 현대그룹의 혼맥도는 초라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권문세가와 통혼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자녀들의 결혼에서 고 정 명예회장의 입김은 멀었다. 오히려 평범한 집안이 대부분이다.
혼맥도에서 직접적인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 알려진 이름은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전부다.
맏며느리인 몽필씨의 부인인 이양자씨(1991년 사망)는 평범한 집안의 장녀로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고작이다.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동서산업의 오너인 이영복 전 회장은 이양자씨의 친정동생으로 고 정 명예회장은 장남의 처남에게 동서산업을 물려준 것으로 재계 관계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둘째 며느리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씨와 셋째 며느리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부인 우경숙씨의 친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우경숙씨의 부친인 우호식씨는 현대그룹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4남 몽우씨의 부인 이행자씨는 대학재학 중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 역시 집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섯째 며느리인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 현대그룹 회장은 현영원 전 신한해운 회장의 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신안해운은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에 흡수됐다. 이에 부친도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하다 현재는 용문학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또 현 회장의 모친 김문희씨는 김용주 전방(전 전남방직) 창업주의 외동딸로 한국걸스카우트 총재, 용문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여성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과 전방 명예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창성씨와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은 현 회장의 동생들이다.
여섯째인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2남4녀 가운데 막내딸이다.
일곱째 며느리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부인 김혜영씨는 김진형 부국석면 회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내며느리인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의 부인 권준희씨는 미국에서 사업을 했던 권영찬씨의 딸로 현대종합금융 고문을 역임했다.

“물질이나 정략이 개입돼서는 안돼”

유일한 사위인 정경희씨의 남편 정희영씨는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한 평사원으로 고 정 명예회장의 눈에 들어 사위로 발탁됐다. 고려대 출신으로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거쳐 현대그룹에서 분가해 지금은 선진종합(주)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처럼 고 정 명예회장의 8남1녀 자녀들은 한결같이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결혼함으로써 현대그룹 혼맥도에 권문세가를 배제시키고 있다. 특히 평범한 집안 출신의 며느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고 정 명예회장은 오히려 사돈들을 현대그룹에 영입, 일자리를 주선했는가 하면 따로 기업을 운영하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권영찬·현영원·이진호씨 등은 그룹(부)회장으로까지 추대됐고, 장정자·이영복·정희영·김영주씨 등은 독립을 주선해 주었다. 다만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퇴임 후에도 현대그룹에 영입되지 않았다. 관료 출신 사돈들을 그룹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다. 기업경영과 자녀들의 혼사를 전혀 연결하지 않고 철저히 배제한 사례다.
고 정 명예회장 스스로도 이 같은 혼사를 치뤘다. 연예결혼 찬미자로 불리었던 그는 부인인 변중석씨를 맞이할 때도 집안간 결정이 아니라 네 번째 가출 끝에 서울 싸전에서 재미를 볼 때 만나 결혼했다.
“결혼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에 물질이나 정략이 개입돼서는 안된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게 고 정 명예회장 부부의 결혼관으로 알려진다.
고 정 명예회장은 자녀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상대자를 집으로 데려오도록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간단한 인사만 받고 먼발치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회없을 만큼 오래 사귀고 나서 결혼을 결정해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들이 1년에서 1년반 정도의 연예 끝에 “이 사람만한 이가 없다”는 말을 하면 그제서야 고 정 명예회장은 결혼을 허락했다. 이어 “평생 이혼 이야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는 다짐을 꼭 받았다.

재벌가 통혼 3세도 연예결혼

고 정 명예회장의 자녀들에 대한 결혼관은 3세에 이르러 조금 변질됐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3세에 이르러 권문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벌간 혼사가 많아진 것이다.
현대그룹 3세의 결혼에 첫 테이프를 끊은 고 정 명예회장의 맏손녀(몽필씨의 장녀) 은희씨는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평사원과 지난 95년 8월 결혼했다. 고려대 응용통계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현대전자 기획실 경영관리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주현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주씨는 학교 졸업후 (주)대우에 2년 정도 근무하다 현대전자로 직장을 옮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은희씨가 이화여대 불문과 2학년이었을 때 친구소개로 만나 연예를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몽필씨의 둘째딸인 유희씨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아들인 김지용 용평리조트 상무와 결혼했다.
손녀사위가 되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딸들은 의사와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평범한 이들과 결혼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정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지난 95년 당시 강원산업 정도원 부회장의 맏딸 지선씨와 결혼했다. 정몽구 회장과 정도원 부회장은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이미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한다. 특히 정 부사장은 부인 지선씨의 사촌오빠인 정대우씨와 중·고교 동창으로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자랐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산업은 2000년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INI스틸에 합병됐다. 정도원 부회장은 현재 삼표산업(주)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초라한 국내 최대 재벌가문 혼맥도

4남 몽우씨의 장남 정일선 비엔지스틸 부사장은 구은희씨와 결혼했다. 은희씨는 구인회 엘지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구자엽 희성건설 부회장의 딸로 두 사람은 미 조지타운대 유학도중 학생모임에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현대그룹 혼맥에서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장녀 숙영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씨와 결혼했다. 또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 정몽익 금강고려화학 부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숙씨의 딸 최은정씨와 결혼했다.
이처럼 현대그룹의 혼맥도는 3세에 이르러 재계와 통혼하며 2세 때보다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룹 규모와 가족수를 감안하면 타 재벌그룹의 혼맥도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단순한 혼맥도가 그려진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동양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동양그룹
슬하에 오직 두 딸만 둬 사위들에 의한 최초의 재벌경영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국내 재벌그룹의 사위경영시대를 연 첫 주자다. 현 회장 이후 여러 기업에서 사위들이 CEO에 오르기도 했지만 여전히 재벌총수라는 자리에 앉은 이는 현 회장이 유일하다. 그만큼 현 회장의 재벌총수로서의 이력은 타 그룹총수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최초의 사위 재벌총수

현 회장을 가리켜 소리없이 실속을 챙기는 기업경영인으로 평가한다. 활발한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내실을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다. 최근 TV드라마에서 흔히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재벌가 딸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고, 이어 기업경영권을 차지하는 톡톡 튀는 능력의 남자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행보가 이 같은 경영스타일의 평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동양그룹의 문화 역시 현 회장의 경영스타일과 비슷하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홍보를 하는 재벌그룹이 아니다. 총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기업의 이미지를 꾸며서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착실히 갈 길을 가면 된다는 게 동양그룹의 기업문화다.
동양그룹의 21세 비전에서도 이 같은 기업문화는 한층 두드러진다. 내실경영을 토대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모든 변수에도 철저한 준비로 대비해 세계 최정상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수익을 내고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업에 핵심역량 집중과 환경변화에 따른 전략적인 사고에 의한 동양만의 독창적인 사업영업 개척이 그 내용이다.
이와 관련 현 회장도 올해 초 “지난해의 성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하며 질적인 성장을 한층 힘차게 전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현 회장의 경영비전은 지난 89년말 장인인 고 이양구 회장에 이어 그룹회장에 취임한 이후 줄곧 그림을 그려왔던 장기구도 아래 이뤄지고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취임 당시 창립 30주년을 맞아 제2의 창업을 선언했던 현 회장은 그룹을 떠받치고 있던 금융·제조·식품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삼각 형태를 유지토록 한다는 기본구상을 밝힌 바 있다. 특히 금융분야에 대한 현 회장의 각별한 관심과 열정은 지금까지도 동양그룹이 금융전문그룹으로 불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상윤 고려대초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 법사위원장
손경식 CJ대표이사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창업주

검사에서 기업경영인으로 변신

현 회장은 경영수업을 쌓기 위해 80년대 초반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유학했으며 재무관리를 전공, MBA를 취득했다. 현 회장은 훗날 “유학기간 중 국제적인 감각을 익힐 수 있었고 금융업에 눈을 뜨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동양그룹은 현 회장 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한 지 1년만인 지난 84년 일국증권을 인수, 동양증권으로 상호를 바꿔 증권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불과 5년만에 25개 증권사 중 업계 10위의 건실한 회사로 키워냈다. 이에 창업투자회사와 생명보험업에 진출하는 등 금융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현 회장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일대 변화를 예고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중에 12회 사법고시에 합격,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던 현 회장이 재벌가의 사위가 된 데에는 고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다리역할을 했다. 고 김 전 총장은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과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고 김 전 총장의 중매로 당시 이화여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고 이 회장의 맏딸 혜경씨와 현 회장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현 회장이 결혼을 통해 신분이 급상승한 것은 아니었다. 검사라는 직업도 직업이었지만 현 회장의 집안 역시 고 이 회장 집안 못지않은 명망가였다. 고 이 회장의 집안이 부를 가졌다면 현 회장의 집안은 학식과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현 회장의 부친은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현인섭(1963년 타계)씨. 또 조부는 고려대 초대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불리는 현상윤씨다.
특히 현 회장은 결혼과 함께 처가의 경영참여 요청에 기업인과 법조인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 19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동양그룹에 첫발을 내딛으며 기업인을 선택, 그의 인생의 일대 변신을 하게 된다.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의 분리

현 회장이 그룹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83년. 아들이 없는 고 이 회장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서 맏사위인 현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 이때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 사장에 취임하면서 장인의 역할을 대신했다.
사위의 경영전면 배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재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둘째 사위 담철곤 오리온제과 회장이 당시 동양제과 임원으로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탓에 호사가들은 분가냐, 경영권 다툼이냐를 입방아에 올리기도 했다.
고 이 회장은 슬하에 아들 없이 두 딸만 두었다. 현 회장의 부인인 혜경씨와 둘째 딸 화경씨로 담 회장은 화경씨의 남편이다.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담 회장을 미팅에서 만나 1980년 결혼에 성공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유학 중 수백 통의 편지가 태평양을 넘나들었을 만큼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명하다. 특히 재벌가의 막내딸이 화교 출신인 담 회장과 사귀고 있다는 데에 재계의 관심은 한층 더했다. 부친은 담연성씨로 개인사업을 했던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담 회장은 대학 4학년 재학중 동양제과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마케팅 부문을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어 1987년 동양제과 사장에 취임하면서 능력을 발휘해 연속 히트상품을 출하하면서 제과업계에 동양의 무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01년 9월 동양제과(현 (주)오리온)를 중심으로 유통, 미디어, 영화, 엔터테인먼트 등 관련 16개사를 동양그룹으로부터 분리, 새롭게 출범한 독자적인 오리온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오리온그룹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제과사업과 함께 유통, 미디어, 영화, 외식 등의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90년대 초 2천~3천억원대에 불과하던 외형도 2002년 말 기준으로 매출액 1조2천여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특히 제과사업에서의 탄탄한 성장력을 발판으로 향후 외식, 미디어,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사업과 제과 해외사업에 핵심역량을 기울여 ‘먹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까지’를 추구하고 있다. 즉 국내 최고의 식품회사는 물론 국내 최대의 토탈 엔터테인먼트그룹으로의 도약이 오리온그룹의 경영비전이다.
이처럼 동양그룹의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가계도는 두 딸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혼맥이 전부다. 두 사돈에 의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혼맥 역시 현 회장쪽에서 이인기 전 영남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 등이 연결되지만 그룹 규모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혼맥이다. 특히 담 회장이 화교라는 점에서 동양그룹의 혼맥은 현 회장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고 이 회장은 자녀들의 혼사에서 철저히 권력과 재산, 집안을 배제했다. 오직 사람 됨됨이만을 살폈다.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었던 그로서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을 맡겨야 할 사윗감은 곧 후계자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맏딸 혜경씨에 따르면 고 이 회장은 학벌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양보를 아는 사람을 택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인간의 성품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혜경씨는 받아들였다.
둘째딸 화경씨 역시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그러시더니 ‘그래, 사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시면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말한다.
물론 고 이 회장에게 형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와 형이 모두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혈혈단신 월남

고 이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부친 이교흠씨와 모친 김성자씨의 2남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중농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6세 때 부친이 별세, 가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학교를 마친 고 이 회장은 15세 때 일본 모리나가 계열사인 함흥물산 사원으로 입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꿈은 ‘국내 최대의 제과회사 주인’이었다.
비록 학교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입사 당시 그의 급여는 13원(쌀 한 가마 값은 6~7원). 그러나 입사 3년만에 37원을 받는 정식사원이 됐으며 6년만에는 대졸 일본인도 어렵다는 60원의 간부직에 앉았다.
이 시기를 고 이 회장이 기업관을 체득한 시기로 분류하는 게 일반적이다.
고 이 회장은 당시 함흥물산의 시노자키 사장으로부터 “상인으로서 대성하려면 정직을 자기 목숨처럼 알아야 한다”는 경영관을 배웠다고 한다. 즉 “일본인에게서 정직·봉사·근면 등 장사꾼이 갖춰야 할 모든 규범을 배웠다”고 훗날 회고한 것이다.
고 이 회장이 사업에 돈을 대기 시작한 것은 함흥물산 입사 6년 후인 21세 때였다. 25만원의 거금을 손에 쥐고 대양공사라는 식품도매상을 차려 20만평의 토지를 사들이는 게 그의 첫 사업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맨몸으로 서울로 단신월남하고 만다. 대부분의 재벌그룹 창업주들이 그렇듯 고 이 회장 역시 좌절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중고 자전거 한 대로 과자행상부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설탕과 밀가루 등을 취급하는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전국 체인망을 형성했다. 당시 1억원의 거금을 손에 쥐며 갑부소리를 듣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번째 좌절을 겪어야 했다.

세 번의 좌절, 세 번의 재기

부산 피난시절 다시 설탕도매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설탕왕’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시장을 석권하며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다. 이어 1956년 풍국제과를 인수, 드디어 어릴 적 꿈이었던 과자회사 주인이 되었다.
오늘날 동양의 기틀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배동환씨와 공동으로 삼척시멘트를 인수하고 1957년 독자경영에 나서면서부터다.
회사 간부들이 일제히 반대했던 삼척시멘트 인수에 대한 고 이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향후 국내 경제발전 전망으로 볼 때 시멘트공업이 절대로 유망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공장 주변에 석회석과 점토 등 시멘트의 원료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고 공장 옆엔 삼척화력발전소가 있어 동력원 확보도 용이했다. 게다가 수송을 위해 철로와 바다를 끼고 있는 삼척시멘트의 천혜의 입지가 그의 결의를 한층 강화시켰다.
시멘트라는 제품이 취급이 용이하고 생산도 비교적 단순하며 국가 기간산업으로써의 명분도 높다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 1억원에 인수했던 삼척시멘트는 회사 간부들의 예상대로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억원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결국 이병철·배동환 등 동업자들이 손을 떼고 고 이 회장은 그동안 축적된 전재산을 투입, 삼척시멘트 단독경영에 나섰다. 그래도 10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1971년 9월 고 이 회장은 회사보전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세 번째이면서도 마지막 좌절을 겪었다. 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할 형편이었고 세인의 온갖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일관된 정직과 신용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세 번의 좌절과 세 번의 재기, 그는 세 번째에서야 비소로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고 이 회장에게는 ‘점원서 출발한 자수성가의 표본’, ‘시멘트산업계의 거인’, ‘오리온성좌의 창업자’, ‘정직·근면의 한평생’, ‘동양철학자, 소크라테스 리’, ‘의리의 화신’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부인과의 드라마 같은 재회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과는 달리 가족은 늘 단촐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두 딸만을 두었다. 대부분의 재벌 창업주들이 그렇듯 아들을 낳아 기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없었던 것일까.
고 이 회장의 부인은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공군 군속으로 귀향한 고 이 회장은 “빨리 장가들어 효도해 달라”는 모친의 뜻에 따라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이 이사장과 약혼했다. 1·4 후퇴로 결혼식도 못 치루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사람은 이 이사장이 피난선으로 월남, 거제도에 머물다고 이 회장과 극적으로 만나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를 이 이사장은 ‘서남 이양구 추모집 동양보다 큰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4후퇴 때 회장님(고 이 회장)께서 군복을 구해와 가장하고 탈출하려고 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헤어졌지요. 그러다 그 이가 부산에 먼저 내려오셔서 승선자 명단을 입수하고…사촌 오라버니가 부산에 일보러 갔다가 그 양반을 만나 내가 거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제로 찾아오셔서 만났어요. 그래서 마산 진갑수(거래처)씨한테 가서 돈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지요. 숟가락 2개, 밥그릇 2개에 사과궤짝 놓고 신접살림 차렸어요. 당시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면서 국제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고 이 회장은 이 이사장의 미모에 반해 결혼했다는 말을 생전 자녀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순진한 면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9탄> 효성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9탄> 효성그룹
조홍제·성제 두 형제의 자녀 결혼 통해 화려하고 방대한 사돈관계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최근 효성그룹 오너 3형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3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그룹안팎의 각종 정지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쏟아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잇따라 효성의 지분을 늘려가고 있어 이같은 분석에 힘을 보태고 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이자 대주주인 조현준 전략본부 부사장과 조현문, 조현상 경영전략 전무와 상무가 그들이다. 이들은 5월에만 수 차례에 걸쳐 보유지분을 대폭 늘렸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3형제의 약진

장남인 조현준 부사장은 5월들어서만 6만9천4백10주를 매수하는 등 지난 3월말부터 5월10일까지 27만7천4백36주(0.84%)를 추가매입, 현재 그의 지분율은 6.29%에 달한다. 둘째인 조현문 경영전략 전무도 4월과 5월 두달에 걸쳐 50만주 이상을 매입해 지분율이 5.98%에 이르고 있다. 셋째 조현상 경영전략 상무의 경우에도 지난 5월12일과 13일 3만6천3백50주를 매입하는 등 꾸준히 장내매입을 통해 5.88%의 지분율을 기록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들 삼형제의 지분매입은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직 삼형제 모두 40세가 되지 않은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후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전망은 성급하다. 특히 삼형제 가운데 누가 그룹회장직을 물려받을 것인가 하는 예측 역시 아직은 이르다.
그러나 엇비슷하게 확보해나가고 있는 이들의 지분율은 조 회장이 낙점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 또한 나오고 있다. 즉 누군가가 합법적으로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미리부터 자기자금과 조 회장으로부터의 증여자금 등으로 주식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한꺼번에 물려받았을 경우 증여세 부담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 효성그룹 오너 삼형제는 보유하고 있던 해외신주인수권(BW)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특혜라는 참여연대 등의 비판을 받고 전량을 소각해 버려 장내에서 합법적으로 지분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처럼 효성그룹 삼형제의 지분율 높이기와 경영권 승계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둘째 조현문 전무의 결혼식은 이들 삼형제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재벌2세의 결혼이라는 것과 함께 이를 계기로 이들 형제가 경영에 참여하기 이전 독특한 활동을 했음이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것이다.

며느리 직접 고르는 전통

먼저 조 전무의 결혼에 대한 관심은 신부가 불을 지폈다. 신부인 이여진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대통령 의전비서관실의 외무관이다. 이여진씨는 조 회장 부부에 의해 며느리로 낙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부모와 며느리의 첫 만남은 지난 2001년 6월 한미재계회의 연례회의 석상에서였다. 당시 로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여진씨는 이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해 우연찮게 조 회장 내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시어머니와는 칵테일을 나누고, 시아버지와는 가볍게 인사를 했던 정도였다.
인연은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본격화됐다. 6개월여 뒤인 2002년 1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한미재계회의에 참석한 조 회장 부부는 또 다시 이여진씨를 만나 2박3일을 함께 했다. 그리고 조 회장이 직접 나서 “성실해 보이고 매너 좋아 보인다”며 둘째 아들에게 소개를 한 것이다. 이때가 방학이었고 마침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이여진씨와 조 전무의 첫 만남도 이루어졌다.
조 회장이 며느리를 예쁘게 봤던 데에는 이여진씨의 아버지도 한몫을 담당했다. 조 회장과 이여진씨의 아버지가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또 셋째 조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
송인상 전 재무장관
노태우 전 대통령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 장관

현상 상무와 이여진씨의 오빠가 연세대와 브라운대에서 함께 공부한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조 전무의 형인 조현준 부사장은 동생보다 2년 앞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국내가 아닌 미국 명문 사립학교인 세인트 폴 고등학교에서 식을 치뤘던 탓에 동생처럼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조 부사장의 부인은 이미경씨로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이 부친이다. 이미경씨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막내인 조현상 상무는 아직 미혼이다.

사돈들 대거 그룹경영에 영입

효성그룹의 창업주는 고 조홍제 회장. 그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의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중도에 결별하고 효성물산을 창업, 오늘날 효성그룹으로 키워냈다. 만우(晩寓)라는 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56세에 기업을 창업했지만 결코 어리석지는 않았음을 생전 곳곳에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늦게 시작했던 그는 결혼만큼은 빨랐다. 고 조 회장은 15세 때 진주 명문호족인 성균관 생원 하세진씨의 둘째딸 정옥씨와 결혼을 했다. 고 조회장보다 1살이 많았지만 이미 할아버지에 의해 일찌감치 정해진 결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방식의 혼사는 조현문 전무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효성그룹 오너 일가의 결혼 대부분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을 알 수 있다. 즉 고 조 회장의 자녀 3남2녀 모두가 본인들 의사에 앞서 부모의 뜻에 따른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고 조 회장과 동생 조성제 전 대전피혁 사장의 2세를 통해 송인상, 김종대, 홍재선, 원용석 가문으로 연결된다. 특히 세 아들을 통해 국내 재계 혼맥도의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 조 회장의 장남이었던 조석래 회장의 당초 꿈은 교수였다. 때문에 결혼보다는 학업에 더 열중했고 이를 보다 못한 고 조 회장이 송인상씨의 1남4녀 가운데 3녀인 광자씨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송인상씨는 재무장관, 수출입은행장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거물로 사돈을 맺기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송인상씨가 조 회장을 사윗감으로 눈여겨 보고 있었고 고 조 회장에게 혼담을 넣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사돈관계인 두 사람의 친분은 더욱 깊어져 송인상씨가 효성그룹 경영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동양나이론 회장을 거쳐 현재는 효성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며느리 소개해 달라”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송인상씨를 사돈으로 맞이하면서 이봉서 전 상공장관, 신명수 신동방 회장과 연결된다. 송 고문의 장녀 원자씨가 이필석 국제화재 전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 전 장관과 결혼했으며 차녀 길자씨가 신 회장과 결혼한 것이다.
형님보다 일찍 결혼한 차남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은 법조계 원로인 홍긍식씨의 4남4녀 가운데 차녀인 문자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막내인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은 당시 경기여고 교장이었던 손영경씨의 중매로 이화여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은주씨와 결혼했다. 조석래 회장과 친분이 있었던 손 교장은 “경기여고 졸업생 가운데 참한 색시감이 있으면 막내며느리로 소개해 달라”는 청을 일찌감치 받아놓고 있었다. 이에 김은주씨를 추천한 것이다.
농림장관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다 효성기계공업 회장을 지낸 김종대씨가 부친이다. 또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세 아들보다 일찍 결혼한 두 딸은 고 조 회장이 고향인 경남 함안의 군북에서 농협조합장을 하고 있을 때 모두 그 인근의 대지주집안으로 출가를 시켰다.
큰딸 명숙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21살 때 진양 대지주인 허복씨의 5남7녀 가운데 차남인 정호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의 결혼 당시 정호씨는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다.
둘째딸 명률씨는 산청의 대지주인 권동혁씨의 3남1녀 가운데 장남인 병규씨와 결혼했다. 병규씨는 성균관대를 졸업한 후 자영업을 하다가 1967년 효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효성건설 회장을 역임한 후 농장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려하고 방대한 혼맥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고 조 회장의 다섯 자녀의 통혼과 함께 고 조 회장의 동생인 조성제씨를 통해 한층 무게를 더한다. 조성제씨는 형님이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동업을 하던 시기에 대일수출용 고철수집 총책으로 형님사업을 돕다가 후에는 대전피혁을 인수하기도 했다.
5남3녀의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조성제씨는 재계와 관계의 거물 인사들을 사돈으로 맞았다. 3남 경래씨가 전경련 회장을 지낸 홍재선씨의 딸 애수씨와 결혼했고 4남 익래씨는 원용필씨의 딸 정선씨와 결혼했다. 원용필씨는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원용석씨의 친형이다. 원용석 전 장관이 훗날 한국타이어와 동양나이론 등 효성그룹 사장을 영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혼맥에 기인했다.
또 조성제씨의 장녀 장숙씨는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종철씨의 아들 창순씨와 결혼했다.
효성그룹 혼맥도의 출발점이기도 한 조홍제·성제 두 형제의 자녀 결혼을 통해 화려하고 방대한 직간접적인 사돈관계가 형성된다. 직접적인 사돈으로 각계의 명망가와 연결되며 전직 대통령 가문과도 두 다리만 건너면 관계를 맺게 된다. 즉 삼성·현대·LG·SK·두산·해태·신동방·대한제분·국제화제보험 등 내노라 하는 국내 재벌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혼맥도에 등장하는 기업인은 19명, 전직 대통령은 물론 학계인사와 대지주까지 포괄하고 있다.
특히 효성그룹 혼맥에서 전직 대통령 가문과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 가문과는 송인상·김종대 가문과 함께 순환고리를 이루는 겹사돈임이 드러난다. 고 조 회장과 직접사돈관계인 김종대씨가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고 송인상씨는 신 회장과 다시 사돈관계인 것이다.

“재산분배는 빠를수록 좋다”

효성그룹은 그동안 국내 재벌그룹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 고 조 회장이 56세에 기업을 창업해 20년만에 재계 서열 10위권으로 성장시킨 것도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천했던 창업주들의 학력과는 달리 고 조 회장은 정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늦게까지 공부하던 인텔리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기에 창업주 생존 당시 일찌감치 2세 3형제에게 그룹을 분가시킨 것도 다른 그룹들과는 다르다. 이는 고 조 회장이 이병철 회장과 동업을 하며 ‘식구끼리라도 재산분배는 빠를수록 좋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정곤 기자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mailto:기자allen@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