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9일 월요일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내가 존경하는 ... STG 이수동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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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위기 속에서도 최근 4개월 동안에 미 연방 정부와 총 2억5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킨 IT기업 STG의 이수동 회장은“고비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위기가 기회 라는 느낌으로 살았다. 누구에게나 기회란 자신이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하원 특파원
"이수동 인생, 참 한심하게 됐다"며 절망하던 그는 미국에서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대학(산업공학과)과 삼성그룹에서 접한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다. 총 매출액 2억달러, 전체 직원 1700명을 거느린 미국의 대형 정보통신업체 STG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수동씨가 1986년 창업한 STG는 지난해 9월부터 4개월 동안 미 연방정부와 총 2억50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는 기록을 세워 주목받았다. 〈본지 지난해 12월 25일자 보도〉 대공황 이래 유례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오히려 올해 25% 성장을 목표로 내건 이수동 STG 회장(60)을 버지니아주 레스톤에 위치한 STG 본사에서 만났다.
― 한국은 물론 미국의 경제도 무척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의 미 연방 정부계약을 성공시킨 배경이 궁금하다.
"미 연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관련 기술을 다져 놓은 것이 큰 힘이 됐다. 9·11 테러 이후 미 연방정부는 IT 분야에서 시스템의 통합운영 능력을 갖춘 업체를 필요로 해왔는데, 우리 회사가 그동안 쌓은 실적과 신용을 보고 결정을 한 것 같다."
― 더 구체적인 비결이 있을 것 같다.
"미 연방정부에 납품을 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80%만 만족시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매년 연방정부의 정책 방향을 분석하고, 최고기술 책임자(CTO·Chief Technology Officer)를 임명해 정부가 앞으로 2~3년 후에는 어떤 분야를 필요로 할 지 끊임없이 연구를 해 왔다."
― 이민 초기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식당 경리직에서 실직한 후 큰처남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 프로그래머 보조(補助)로 취직을 했다. 처음엔 영어가 안 돼 프린트한 카피(copy)를 가져달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해 고민하다가 커피를 타서 가져다 주기도 했다. 도저히 미국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 서울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나?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고 싶어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나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를 조이고 또 조였다. 그랬더니 2~3년이 지나니까 영어도 들리기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돼 미국의 연방감사원(GAO)을 거쳐 정보통신업체인 MCI에서 경력을 쌓았다. 1986년에는 연봉을 8만달러까지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때 이 회장의 도전 기질이 다시 발동했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자신의 사업체인 STG를 창업했다. 낮에는 MCI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자신의 사업을 하는 생활을 5년 가까이 하다가 1991년 MCI에 사표를 냈다.
― 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왔는데.
"사실 그때가 고비였다. 워싱턴 DC의 연방정부로부터 일감을 얻기 위해 구두가 다 닳도록 돌아다녔다. 연방정부를 모두 도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납품 담당자를 직접 만나서 설득을 했다. 그런데도 큰 일감을 얻지 못해서 힘든 생활이 계속됐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연방정부를 다시 한 바퀴를 돌면서 명함을 뿌리고 또 뿌렸다."
― 어떤 반응이 있었나?
"1993년 국무부에서 인사관리 프로그램을 300만달러에 수주하면서 숨통이 뚫리기 시작했다. 당시 백악관에서 컴퓨터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인사를 적극 영입해서 영업에 나서게 한 것이 주효했다."
― 소수계층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미국은 이민국가 아닌가. 나는 소수계층이라는 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의 연방정부에 8(a)로 불리는 제도가 있다. 계약의 일부분을 소수민족이나 여성, 장애인 등 소수계층에게 할애하는 것이다. 이 제도를 100% 이용하며 사업을 확장시켜 왔다."
― 회사를 이렇게 성장시킨 경영 철학이 있을 것 같다.
" STG에는 직원과 고객을 잇는 '성공의 순환법칙(Circle of Success)' 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다. 뛰어난 인재들을 적절한 시기에 적성에 맞게 배치하면 큰 성과를 가져오게 돼 있다.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교육 기회를 주고 직원의 배우자를 배려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녀들에게는 인턴십을 부여해 왔다."
― 그 고리가 어떻게 고객에게로 연결되나?
"직원들을 잘 배려하게 되면 그들이 회사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고객들을 잘 관리하게 돼 있다. 결국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계속해서 STG를 찾도록 만들었다."
― 미국에는 STG가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 내 경영 철학 중의 하나가 '가족적인 경영'이다. 냉장고에는 항상 먹을 것을 채워놓고 있다. 직원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친해지도록 하는 데 무한대의 예산을 쓰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 한국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데.
"나만큼 환경이 어려웠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중학생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쁜 길로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공부시킨 형수님이 내가 잘못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싶어서 나를 채찍질했다. 위기가 기회라는 느낌으로 살아왔다. 어려운 상황을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기회는 절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노력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
― 한국의 기업에 조언한다면?
"지금 어느 때보다 상황이 어렵지만 경제위기가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할 때 즉각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위기에 처하면 이를 극복하는 창조적인 정신을 많이 발휘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STG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2006년 12월에 회사 창립 20주년을 맞아서 '1B16' 계획을 발표했다. 30주년이 되는 2016년까지 STG를 매출액 10억달러(1Billion)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앞으로 7년 남았다."
美국방부 등에 IT시스템 납품… 직원 1700명
'STG' 는?
동부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버지니아주 레스톤에 있는 STG는 미 국방부, 국무부, 국가보훈처 등에 IT 시스템 및 관련 장비를 납품하는 대형업체다. 지난해 미 국방부의 비밀 정보를 예비군 시설에 전송하는 시스템을 설치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며 국무부의 연봉 지급 시스템, 해외 미국 대사관의 비자업무 관련 시스템의 유지, 보수업무 등을 맡고 있다.
STG는 미 연방정부의 100대 IT 주계약 기업 중의 하나이며 워싱턴 비즈니스 저널이 선정하는 25대 IT기업체에 포함됐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지상욱 대변인은

“아내 심은하의 뽀뽀가 가장 큰 후원이죠”
자유선진당 대변인 지상욱(45)씨가 6월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된다. 여배우 심은하씨의 남편이자 이회창 선진당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이 젊은 정치인은 누구인가? 심은하 이회창에 가려진 정치인 지상욱의 민얼굴을 보기 위해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선진당 대변인실을 찾았다.
-2003년 3월 만 38세의 젊은 연구원이 직장도 그만두고 이회창 대표를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대표 곁에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째로 낙선했고, 어쩌면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볼 수 있었던 이 대표를 왜 돕기로 한 겁니까?
“지인이 총재님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당시 총재님 주변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죠. 염량세태(炎凉世態)라고 하나요? 그래서 제가 총재님을 찾아가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정치권에 몸담지 않아 비교적 순수했고,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분이 미국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이 대표가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2003년 3월부터 8개월간 미국 스탠퍼드대에 머무는 동안 지 대변인은 내내 옆에서 보좌했다)
선진당은 지난 17일 총재직을 폐지하고 대표체제로 전환했다. 그런데도 지 대변인은 이 대표를 계속 “총재님”이라고 불렀다.
-이 대표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요?
“총재님은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총재님을 존경했어요. 그분이 은퇴 회견하는 걸 TV로 보면서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칙주의, 대쪽정신, 보수주의 등 그분이 대표했던 가치가 있는데 저렇게 사라지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분을 도와 올바른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데 나의 몇 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럼 처음엔 정치를 하겠다고 이 대표 곁으로 간 건 아니네요?
“그럼요.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해서 20년 넘게 공학을 공부한 사람이 정치에 무슨 뜻이 있었겠어요? 그분을 좋아했기 때문에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간 거예요. 회사(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얘기했더니 많이 놀랐어요. 2008년 1월 선진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을 때에야 ‘아, 내가 이제 정치에 들어가는 구나’ 그런 마음이 들더군요.”(지 대변인은 초대 대변인을 맡았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에서 선진당은 비례대표 4명을 포함해 18명을 당선시켰습니다. 지 대변인은 당시 비례대표 신청도 안 했는데.
“한 달 만에 당을 만들어 총재님이 어려웠던 시기죠. 저희는 측근그룹이잖아요? 측근을 챙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 저희도 처신하기 어려웠죠. 나까지 부담 드릴 수 있나요. 그래서 비례대표 신청을 안 한 거예요. 저라고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어요? 여의도에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의원직이 있어야 되잖아요? 운전을 하기 위한 면허증 같은 거.”
-그때 이 대표를 떠날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의리도 지켰고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 너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지금 정부 쪽에 와서 일하면 어떻겠느냐, 청와대 관계자한테 이런 제안도 받았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다고 했죠. 총선이 끝나고 총재님께 좀 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한 1년간 가족과 시간을 보냈죠. (2009년 8월 이 총재와 갈등을 겪은) 심대평 대표가 떠나고 당이 어려워지는 걸 보면서 총재님이 힘들어하시겠구나, 그래서 지난해 10월 총재 공보특보로 복귀한 거예요.”
-군인 출신으로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떻게 심은하(38)씨를 만났습니까?
“(2004년 12월) 누가 소개를 해서 처음 봤습니다. 당시엔 결혼 생각은 없었던 때였어요. 그 친구도 조용히 지낼 때고. 그렇게 만났는데 제가 좋아하게 된 거죠.”
-어떻게 마음을 얻었습니까?
“2005년 5월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로 1주일간 출장을 갔어요. 저 친구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매일매일 카드를 쓴 거예요. 학교 북스토어에 가서 카드를 하나 사서 쓰고 싶은 말을 적고 선물도 하나씩 샀어요. 어떤 날은 초콜릿을, 어떤 날은 화장품을 사고. 그렇게 7개의 카드와 선물을 준비했죠. 그걸 서울로 가져와서 줬어요. 그때 감동하더라고요. 선물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매일매일 자기를 생각했던 마음, 그거에 집사람이 마음을 확 열었어요.”(두 사람은 그해 10월 결혼에 골인한다)
-집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나요?
“처음엔 우려하셨죠. 그런데 만나 보시더니 착하다, 순수하다, 그러시면서 쉽게 승낙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철저하신 편인데 며느리 작품을 봐야겠다며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인터뷰’ 그리고 드라마 ‘청춘의 덫’까지 죄다 빌려 보셨어요. 지금은 며느리 일이라면 끔찍이 생각하세요.”
-결혼 전에 심씨에게 앞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을 했습니까?
“얘기했죠. 걱정하고 반대했어요. 이젠 결혼생활 5년 됐는데, 그동안 남편이 일하는 거 보면서 그래도 신념이 있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봐주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제대로 정치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어요.”
-부인께서 남편을 지지하고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표현합니까?
“오늘 아침 7시50분쯤 집에서 나왔는데 뽀뽀를 해주더라고요. 사실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편이에요. 손을 꼭 잡아준다든지 그러면 제가 느끼죠. 밖에 있을 때 문자를 넣어주기도 해요. 당신 밖에서 힘들겠지만 나하고 우리 애들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고 오라고. 그런 게 가장 큰 후원이에요.”
-그간 가정의 위기는 없었나요. 부부싸움이나 갈등은 어떻게 해소합니까?
“특별한 위기는 없었어요.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함께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살아왔으니까요. 보육 문제 가지고 이견이 있어 가끔 티격태격할 때가 있긴 해요.”
-심씨의 연예계 복귀도 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 사람의 안사람, 또 두 딸의 엄마로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애들이 지금 네 살, 다섯 살인데, 만으로 하면 겨우 두 살, 세 살이에요. 애들이 지금 엄마의 손을 가장 그리워할 때죠.”
부부는 지난해 방송통신대학에 나란히 입학했다. 부인은 문화교양학과, 남편은 법학과 공부를 하고 있다. 지 대변인은 아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학업에 열심이라고 전했다.
-정치인으로서 목표가 뭡니까?
“뭐가 되겠다는 목표보다는 책임을 지는 정치, 그런 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책임을 지는 정치라는 게 어떤 겁니까?
“약속을 안 지키는 무책임, 아닌 것을 그런 것처럼 말해서 혹세무민하는 무책임, 뒷일 감당하지 않고 그냥 벌여놓는 무책임, 그런 무책임들이 우리 정치에 팽배하다고 봅니다.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도 그래요. 세종시 문제의 출발은 정치권의 무책임이죠. 원안을 뒤집으면서도 아무도 책임 지지 않잖아요. 4대강도 후손을 위해 순수하게 한다고 하면, 외국처럼 철저하게 해야죠. 기획, 타당성 조사, 환경생태평가, 그리고 지역주민들 대책 세우고 대국민 설득을 하는데 적어도 5∼6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예산을 쪼개서 15∼20년 걸려 해야 되는 거죠. 강은 한번 훼손되면 바꾸기 어려운 건데 임기 내 정치 목적으로 써먹고 말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달 대변인을 다시 맡아 최근 정력적으로 논평을 내고 있습니다. 근래 개인적으로 가장 격분해서 발표한 논평은 뭡니까?
“격분했다?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사망 사건 같은 건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죠. 이 사회가 왜 자꾸 이렇게 돼 가는지 화도 나고. 무형의 가치, 그러니까 권위라든지 법치라든지 공권력이라든지 신뢰라든지, 그런 게 많이 파괴돼서 이렇게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서울시장 출마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출마합니까?
“아직 고민의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거 같아요. 워낙 큰 선거니까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거고. 당 안팎에서 제 출마설이 나오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언젠가는 결정을 해야겠죠.”
지상욱 대변인은
1965년 서울 출생.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토목공학 석사, 일본 도쿄대에서 건설관리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98년 귀국해 연세대에서 강의를 했고, 99년 6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입사, 4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다. 2005년 10월 심은하씨와 결혼, 딸 둘을 두었다. 한성실업 창업자 지성한 회장의 아들로 현재 이 회사 부사장이기도 하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앱 이코노미 : 소프트웨어 산업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먼저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 예측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시장조사기관인 Research2Guidance에서 내놓은 세계 스마트폰 성장 예상치(!)다 (출처보기). 가히 놀라운 성장세다.

주의할 점: 시장조사기관의 ‘예상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정확한 수치로 이해하기 보다는 ‘경향’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다수의 조사기관에서 발표하는 예상치들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스마트폰 시장 그리고 이와 연동된 앱(App)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Gartner 시장전망에 대한 기사보기). 위의 스마트폰 시장전망에 기초한다면, 전 세계 앱 시장은 2009년 약 19억4천만 달러에서 2013년 약 156억5천만 달러로 약 80배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무료 앱’의 규모까지 합산한다면, 가히 ‘앱 이코노미(App Economy)’가 단숨에 모든 소프트웨어 시장을 점령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Gartner는 2013년 앱 시장 규모를 300억 달러로 예측하고 있다.
과연 파죽시제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앱 시장은 모든 소프트웨어 생산기업에게 장미빛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 어떤 시장의 변화들이 예상될까?
1. 가치사슬(Value Chain) 변화 (1): 소프트웨어 공급단계의 간소화
우선 기존 대형 소프트웨어 공급자 중심의 질서에 금이 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기업형 소프트웨어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IBM, 오라클, 엑센추어 그리고 독일의 SAP은 잘개쪼개져 원자화된 앱 형식의 소프트웨어 생산에 짧지 않은 적응기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적응기 동안, 구글은 기업형 소프트웨어 시장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할 것이며 (출처기사보기),앱 시장의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진 덕에 중소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물밀듯이 새로운 앱들을 선보일 것이다. 이러한 조정기를 겪게 되면, 소프트웨어 가치사슬에서 대형 공급자들에게 일반화되었던, 오랜 기간의 기획, 개발, 검증, 기업 컨설팅 단계들이 사라지거나 축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위의 대형기업들은 소프트웨어 판매에서도 돈을 벌었지만, 예의 ‘컨설팅’으로 적지않은 돈을 벌어 왔다. ‘아주 작은 문제’ 또는 ‘아주 작은 과제’를 위한 ‘아주 작은 프로그램’이 바로 ‘앱’이다. 이러한 앱을 사용하기 위한 사전 교육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복잡한 대형 소프트웨어 운영에서와 같은 ‘전문가 상담/컨설팅’에 대한 수요는 급감할 것이다. 이는 대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에게 커다란 영업손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만큼 대형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엡 시장이 앞으로 급팽창한다면 어딘가에선 일자리가 생겨야한다. 그곳이 어딜까?
2. 가치사슬의 변화 (2): 앱 홍보 및 중계업자가 개발자의 개발이익을 가져간다
분명 중소 소프트웨어 기업에서는 앱 개발자들의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날 것이다. 또한 매우 작은 규모의 밴처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애플 앱스토어나 구글 안드로이드 앱 마켓에서 각각 순위 100위 밖에 있는 앱이 소비자들에게 팔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현재 약 20만 또는 2만에 이르는 앱의 숫자는 스마트폰 시장의 팽창과 함께 더욱 크게 늘어날 것이다. 그러한 ‘앱의 홍수’ 속에서 앱 개발자 또는 소규모 개발회사가 자신의 앱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 앱을 다양한 소셜 미디어 속에서 ‘홍보’하거나, 별도의 앱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앱 중계서비스’ 기업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업들이 앱 개발자들의 개발이익 중 많은 부분을 가져갈 것이다. 특히 무료 앱을 제공하는 개발자들에게 이들 중계자의 역할은 더욱 절실하다. 영어 무료앱을 사용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무료 앱의 수익원은 ‘광고’다. 소비자가 없는 무료 앱? 아예 무료 앱에 광고를 중계하고, 무료 앱을 다시 소비자에게 홍보하는 일 모두를 맡는 ‘앱 중계업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계업자는 이에 상응하는 수수료를 요구할 것이다.
3. 가치사슬의 변화 (3): 이동통신사업자의 역할은 축소되고
현재 휴대전화 가치사슬에서 이동통신사업자의 역할은, 언론의 역할과 유사한 이른바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다. 모바일 게임 개발기업에게 쉽지 않은 시장관문은 바로 SK와 KT다. 일단 이 관문을 통과하면 시장에서 ‘최소한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렇게 KT와 SK는 이른바 ‘가두리 양식장 Walled Garden’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런데 KT와 SK의 ‘양식장’이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일시에 사라진다. 소비자들이 다른 양식장으로 이동해 버린다. 그들이 새로 찾은 양식장이 ‘애플 앱스토어’이고 ‘안드로이드 앱 마켓’이다. 특히 애플(Apple)은 이동통신사업자가 했던 주인장 역할도 떠맡으려 한다 (관련기사보기). 새로운 공룡 ‘게이트키퍼(Gatekeeper)’의 탄생이다.
짧게 정리하면, 스마트폰의 대중화는 관련 시장의 재편을 수반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 관련자 모두가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시장 참여자들의 ‘저항’ 또한 예견된다.
360억 대작 게임 만드는 CEO의 통쾌한 배짱
당시 데이콤이 어떤 회사인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취업 선호도 선두를 다투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데이콤 내부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동료들은 깜짝 사표를 던진 그를 볼때마다 "벌써 그만두는 이유가 뭐야, 더 좋은데 가는 거냐?"고 집요하게 물었고 침묵하던 그는 결국 이렇게 대답한다.
"벤처로 가겠습니다."
반응은 엇갈렸다. 벤처가 뜨고 있으니 해볼만하다며 격려해주는 이들과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보는 시각이 공존했다. 앵글은 달라도 둘을 관통하는 시선은 하나였다. '젊은 친구가 배짱한번 좋다'였다.
'배짱 좋은 사나이' 김강석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한번 바뀔 시간이 흘렀건만 버릇 남못준다고 그는 바뀐게 별로 없다. 마흔이 넘어도 배짱은 지금도 그를 상징하는 수식어다. 오히려 10년전보다 두둑해졌다.
그는 지금 신생 게임 업체 블루홀스튜디오에서 360억원짜리 초대형 온라인 게임 프로젝트 '테라'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CEO로 뛰고 있다. 엔씨소프트나 넥슨같은 회사들이야 몇백억들여 게임 만들었다가 망해도 그려려니 하면 되지만 신생 업체인 블루홀스튜디오는 처지가 다르다.
한방 제대로 터뜨리면 게임업계 판을 바꾸는 거고 안되면 그걸로 아웃이다. 모 아니면 도, 그야말로 단판승부다. 두려움에 발목을 잡히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리더의 두둑한 배짱이 필요한 프로젝트다.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던 사회 초년병 김강석은 10년이 지난 지금, 무명에 가까운 게임업체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 변신했다. 데이콤을 떠나 지난 10년간 걸어온 길을 들어보니 예상대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저런 고생도 했고, 크고 작은 변화도 겪었다. 나이도 어느새 40대로 됐다. 변한게 없다면 뭔가 새로운 것에 뛰어드는 것을 피하지 않는 배짱뿐이지 싶다. 무릎팍 도사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의 배짱을 제대로 한번 파헤쳐보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도전 또 도전, 배짱의 벤처 인생
김강석 대표는 데이콤을 그만두면서 어딘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벤처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서를 보면 그 흔적이 없다. 데이콤 다음에는 오즈테크놀러지 공동 창업한 스토리가 나온다. 벤처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 바로 창업에 뛰어든 것인가?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는 데이콤 퇴사후 실제 모 IT벤처기업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이 시간이 경력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가 모 벤처에 잠시 몸담았던 것은 가까운 지인들 밖에 모르는 일이다.
왜 숨기는 것일까?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지만 그래도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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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이 투자받은 돈을 조금 막 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복리후생이 나아져 좋기도 했습니다만, 공사가 구분 안 되는 마인드를 가진 경영진이 있는 회사라면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죠.”
김 대표는 그 당시 직장 생활이 너무 짧고 부끄러웠는지 이력서에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속에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하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벤처로 뛰어든 3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모럴 해저드에 빠진 사이비 벤처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먼 상였다.
그는 다시 변화를 선택했다. 안정된 대기업으로 복귀? 그 반대다.
그는 또 한번 배짱을 부렸다. 내친김에 회사를 직접 차리기로 한 것이다. 김 대표를 포함해 4명이 의기투합해 공동 창업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만든 회사가 인터넷 업체 오즈테크놀로지였다.
김 대표가 설립한 오즈테크놀러지는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다. 2년간 배고픈 벤처생활이 이어졌다. 이쯤되면 그냥 데이콤에 있을껄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는 후회는 해본적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물론이고 배고픈 시절에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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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후회를 하지 않는 것과 사업은 별개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만큼,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결론은 회사를 넘기는 것이었다.
오즈테크놀러지는 당시 나성균 대표를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 중이던 네오위즈에 피인수된다. 네오위즈에서 그는 평생의 든든한 동지 한명을 만나게 된다. ‘첫눈’이라는 검색엔진 회사를 300억원에 NHN에 넘기면서 잿팟을 터트린 장본인이자 현재 블루홀스튜디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장병규 CSO다.
회사가 통째로 넘어간 만큼 자연스럽게 김 대표는 네오위즈 사람이 됐다. 네오위즈에서 김 대표는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 서비스 기획 업무를 맡다가 게임 사업 부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럭저럭 걱정없이 살던 시절이었다. 네오위즈하면 이 바닥에선 알아주는 회사였다. 그러나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택의 순간이 또 다시 그를 찾아왔다. 네오위즈를 공동 설립한 장병규 CSO가 회사에 검색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을 결정하면서 김 대표에게 함께하자고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김 대표는 이때만큼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첫눈이 독자적 검색 서비스를 통해 네이버를 넘어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죠. 당연히 첫눈은 인수가 되기에 좋은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제가 거기 합류했다면 두 번째 피인수자 신분이 되는 셈인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네오위즈에서 아직 내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도 못한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겠죠."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첫눈은 300억원이라는 거액에 NHN에 피인수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가 만약 첫눈에 합류했다면 네오위즈와 마찬가지로 지금쯤 NHN에서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 대표는 첫눈과 함께 하지 않아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장병규 CSO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블루홀스튜디오에서 그와 다시 의기투합한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뜨거운 감자', 테라를 말하다
데이콤을 박차고 나온지 10년이 흐른 지금, 김강석 대표는 게임업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중 한명이 됐다. 블루홀스튜디오가 2010년 최대 기대작이자 블록버스터 온라인게임 ‘테라’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홀스튜디오의 처녀작 ‘테라’는 영화로 치면 ‘아바타’급의 폭발력은 지녔다고 평가받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다. ‘스타크래프트2’와도 견줄만한 흥행력을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만큼 거액이 투입된 초특급 프로젝트라는 얘기다.
블루홀스튜디오는 ‘테라’ 개발을 위해 동종 게임의 약 10배에 달하는 개발비와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200여명 개발자들을 투입했다. 이를 통해 ‘테라’는 전 세계 최초로 MMORPG에 논타겟팅(Non-Targeting) 전투를 구현해냈다.
이는 온라인게임 특성상 상당한 서버 부하를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그만한 개발력이 없으면 애당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기술로 평가받는다. 설령 구현해냈다고 해도 워낙 변수가 많아 원활한 서비스가 이뤄지지 않을 위험도 있다. ‘테라’의 ‘논타겟팅’ 전투가 단순한 차별화 요소를 넘어 한국 온라인게임의 위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이런 게임을 신생 게임 업체가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년차 프로야구 선수가 그라운드의 판을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김 대표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진하게 풍긴다.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믿음의 뿌리는 블루홀스튜디오 개발자들에 대한 신뢰였다. 김 대표는 주축 개발자들이 엔씨소프트 ‘리니지3’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할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췄다고 자랑한다. 자신은 이들이 온라인 게임 시장의 룰을 바꿀 수 있도록 측면에서 지원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게임회사 CEO는 개발자를 철저히 이해해야 합니다. 개발자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개발자들도 파트에 따라 나뉠 정도죠. 게다가 각 파트의 차이는 거의 화성인과 금성인 정도 수준으로 차이가 납니다. 경영진이 같은 프로토콜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도록 접합 역할을 하지 못하면 결국 따로 놀게 되는거죠."
블루홀스튜디오 개발자중 다수가 엔씨소프트 출신이라는 것은 테라가 ‘리니지3’의 아류가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엔씨소프트와 블루홀간 법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말을 아낀다.
“확실한 것은 창업을 한 이후에 모든 것을 전부 새롭게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리니지3’를 기반으로 신작을 만든다면 전작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족쇄로 작용할 뿐 전혀 창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죠.”
360억원짜리 초대형 온라인 게임 프로젝트 '테라'는 몇개월뒤에 일반에 공개된다. 대박을 터뜨릴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기대가 큰 만큼 위험도 그만큼 존재한다. 제 아무리 강심장을 갖춘 리더라고 해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블루홀스튜디오는 테라에 회사의 모든 운명을 건 상황이 아니던가.
"솔직히 요즘 잠이 잘 안 옵니다. 내가 오늘 하루도 맞는 결정을 하고 왔을까하는 고민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신생 개발사가 이렇게 많은 개발비를 쓴 것은 전례가 없는 부분이거든요. 아무리 사소한 결정이라도 도대체 맞는 결정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매일 그런 본질적인 문제에 늘 시달립니다.그래도 실패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테라라 될거라 믿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믿기 때문이에요."
게임 사업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산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순이익률 등 게임 사업이 주는 달콤한 유혹만 바라보는데, 앞서 글로벌 경쟁력을 고민해야 한다는게 김 대표 지론이다.
“지난 3년 동안 줄곧 강조했던 경쟁력은 바로 글로벌입니다. 전 세계에서 블록버스터급 MMORPG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개발 스튜디오는 손가락으로 꼽습니다. 그만큼 대작을 만든다는 것은 어렵다는 이야기죠. 아무리 게임업계가 경쟁이 치열하다지만 대작 MMORPG 만큼은 블루오션입니다. 공급 측면에서 리스크 관리가 더 어려운 시장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블루홀스튜디오의 기회라고 봅니다.”
■ 픽사의 스티브 잡스 같은 CEO를 꿈꾸며
게임쪽 관계자들이 아니라면 블루홀스튜디오와 김강석 대표를 모를 수도 있겠다. 엔씨소프트와 넥슨이면 몰라도 블루홀스튜디오를 모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혹자는 블루홀스튜디오를 모르는 이들에게 '첫눈' 만들었던 장병규가 새로 만든 게임 회사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만큼 블루홀스튜디오는 아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다. 게임 업계의 다크호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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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김강석 대표를 좀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다. 석사 과정도 밟았다. 걸어온 길은 파란만장했지만 세속의 잣대를 내밀면 엘리트 출신이다.
성격은 조용한 편이다. 한번 말을 꺼내면 달변가의 모습을 보이지만 카리스마형 리더는 아니니다. 수줍음도 종종 탄다.
직원들에게 형처럼 비춰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직원들과 돌아가며 점심을 먹고 격의 없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회사 대표와 하는 식사 자리를 불편해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는 직원들이 스스로 다가와서 책상을 치면서 문제제기를 할 정도가 되면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또 바로 지금이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가 롤모델로 생각하는 CEO는 다름 아닌 스티브 잡스다. 형같은 CEO를 꿈꾼다면서 대단한 카리스마를 갖춘 스티브 잡스를 좋아한다고? 어딘가 엇박자다.
김 대표가 말하는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경영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다. 픽사 경영자로서 스티브 잡스를 의미한다. 애플에서 ‘스티브나이즈드(化)’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스티브잡스는 픽사에서 핵심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훌륭하게 회사를 이끌었다는 이유에서다.
직원들 사이에서 김 대표가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비전 제시 능력이다. 그는 직원 하나하나에게 꼼꼼히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이루도록 독려하기를 좋아한다. 직원들에게 네가 일한 오늘이 MMORPG의 역사를 쓴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직원을 채용할 때도 열정을 가장 큰 기준으로 삼는다. 스스로 걸어왔던 모습을 직원들에게서 다시 발견하고 싶은 것일까? 묻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 대표는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지 않는다.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도 뚜벅이로 산다. 책 읽을 시간을 갖고 싶어서다.
“최근에는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질적인 생각이 만나야 창조적인 생각이 나온다는 통합적 사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의사결정이라는 것이 선택에 따라 다른 한쪽은 버려야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버린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죠. 그런데 그 책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훌륭한 CEO들은 둘 다를 버리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많은 이들이 벤처 세계에 뛰어들었고, 또 사라졌다. 사기꾼에 가까운 이들도 있었고 지금 보면 참 아까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들이 빛을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어떤식으로든 벤처를 떠난 사람들중 다시 돌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패자란 주홍글씨가 찍힌 이들에게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인색한 모습을 보여왔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보고 모든 것을 평가하려 들었다. 벤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벤처는 99% 실패할 수 있다는 일반론이 먹혀들 공간은 크지 않았다. 성공한 벤처만이 대접받을 수 있었고, 요상한 기준은 지금도 크게 달라진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실패한 벤처맨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김강석 대표는 어렵게 보낸 시간은 있었지만 벤처 세계에서 실패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도 언제든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벤처란게 원래 그런 것이다. 블루홀스튜디오가 올인하는 '테라' 역시 마찬가지. 기대 이하의 성적표가 나올 수 있다. 될 것 같았는데 결국 무덤속으로 들어간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게, 벤처의 역사다.
김강석 대표의 다음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미래가 데이콤을 그만두고 보낸 지난 10년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공과 실패를 넘어, 하고싶은 일들을 특유의 배짱으로 해나가는 시간을 계속 가졌으면 좋겠다. 김 대표와 같은 이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나라의 왜곡된 벤처관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싶은 일들을 도전적으로 해나가는 아름다운 벤처기업인들이 많아지는 풍경, 개인적으론 이를 벤처2.0 시대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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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7일 일요일
'트위터 번개'로 푼 임정욱 라이코스 대표의 '美 인터넷이야기'
'트위터 번개'로 푼 임정욱 라이코스 대표의 '美 인터넷이야기' |
서정근기자 antilaw@inews24.com ![]() |
"많은 이들이 왜 미국에서만 글로벌한 IT 서비스가 등장하는지 궁금해하는 한편 안타까워 합니다. 우리 뿐 아니라 일본, 유럽의 인터넷 업계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출발점부터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가 '영어'라는 사실 자체가 빼도 박도 못할 (차이를 만드는) 일이지요. PC 생산도 미주권에서 대량으로 이뤄지고 표준도 영어로 구성돼 있지 않습니까. 휴대폰도 마찬가지지요." 임정욱 대표가 언급한,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는 어쩌면 체급 구별이 없는 운동 경기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인에 비해 우위를 점하는 것과 비슷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를 메우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창의, 정부와 각 산업 주도군들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임 대표는 지난 5일 저녁, 서울 한남동 다음 사옥에서 '트위터 번개'를 통해 모인 90여명의 '트위티언'들을 상대로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느꼈던 미국과 인터넷 세상에 대한 단상을 털어 놓았다. 모임 공지가 트위터를 통해 이뤄졌고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이를 동영상으로 생중계 했다. ![]() ◆ 참담해 보였던 라이코스 상황, 그러나 美 시장은 넓었다 임 대표가 미 대륙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던 지난 1998년, IMF 한파가 몰아닥쳤을 때다. 유학을 선택한 그가 버클리대에 입학한 후 접한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고. "2000년부터 닷컴버블이 꺼지며 실리콘밸리가 망해가던 상황이었습니다. 휴대폰과 초고속인터넷의 발전상 등을 볼 때 한국 IT의 발전이 더 빨라보였습니다." 9.11테러가 난 후 조선일보로 복귀한 그는 선배인 석종훈 전 다음 대표의 권유로 다음에 입사했고 1년여 전 다음의 자회사인 라이코스 대표로 발령이 나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처음엔 두렵고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라이코스가 해온 모든 사업들이 다 실패했고 창립 후 15년 동안 매년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어떻게 15년간 한결같이 적자만 내고 있었을까' 놀라울 지경이었죠." 300여명에 달했던 조직이 '꾸준한' 감원을 통해 50명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인데 회사 분위기가 좋을리 없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사장인 임 대표가 옆에서 지켜봐도 회사 책상에 앉아 버젓이, 구직을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오후 5시만 되면 모두가 칼 퇴근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희망이 보인 건 작년 3분기에 처음으로 흑자를 내면서 부터였습니다. 4분기까지 결산결과 창립 16주년만에 첫 연간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근근히' 흑자를 낸 라이코스의 연간 매출은 한화 300억원 남짓. 이중 절반 가량은 검색사업으로 인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라이코스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고 보면 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은 아는데 잊혀진 브랜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 아이폰, 트위터에 빠지다 아이폰을 초기 버전부터 이용한 임 대표는 이내 트위터에 재미를 붙였다. 라이코스에는 임 대표외에 단 한 사람의 한국인도 없다. 미국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현지인들과 비지니스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선 그들이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첨에 트위터는 익명으로 했습니다. 일하라고 미국 보내놨는데 놀고 있는 것 처럼 보일까봐 그랬죠." 임 대표는 한국을 비롯한 각국 이용자들과 교감을 나눴다. 트위터를 통해 손정의 회장과 교분을 맺는 등 국경을 넘는 교류도 가능했다. 트윗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얻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트위티언들과 교류하던 그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였다고. 이후 그는 실명으로 교류를 진행중이고, 당시 인연이 닿았던 이들을 번개 형식으로 불러모은 게 이날 모임이었다. ◆ 트위터는 다른 매체와 보완관계· · · 현지 SNS 성공이유는? 임 대표는 "트위터가 다른 매체와 상호 보완관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미국 슈퍼볼 결승 시청률은 사상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전통 매체인 TV를 통해 펼쳐진 중계가 각종 디지털 미디어가 넘쳐나는 현 상황에서 그러한 성과를 기록한 것은 역설적으로 아이폰 등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킹 서비스 때문이라는 게 임 대표의 분석이다. 지인들과 트위터로 슈퍼볼과 관련한 메시지를 나누며 관심없던 사람도 TV를 켜서 보게 되고, 중계를 보면서 페이스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출됐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트위터의 특성상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순 없겠죠. 트위터로 못다 한 말은 블로그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각 서비스들이 보완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미국에서 SNS가 성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은 미국의 디지털 서비스 이용층의 90% 이상이 사용하고 있다"며 "워낙 큰 나라이기에 가족과 친지들이 멀리 떨어지기 마련이고 이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SNS가 대신하며 안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고 진단했다. ◆ 구글의 힘···편리한 서비스 역작용에 대한 우려도 임 대표는 "구글을 받쳐주는 버팀목은 위키피디아"라고 단언한다. 영미권에 지식인 같은 서비스가 없지만 위키피디아가 그러한 공백을 거뜬히 메워준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있으니 음성검색을 통해 바로 바로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사람찾기, 인물정보가 너무 잘 갖춰져 비즈니스에 활용하기도 좋다고 털어놨다. "뭐든지 궁금한거 검색하면 알 수 있어 암기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물론 역작용도 없지 않다. 스마트폰은 다 좋은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휘발성 있는 정보들을 사람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전에 매스미디어의 권위가 있을때 신문에 나오는 내용이 다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 처럼 말이다. "구글의 에릭 슈미츠 CEO도 언급한 것 처럼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검색하면 다 나오고 연결을 통해 정보의 폭을 넓혀주나 딥 씽킹(Deep thinking)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기사와 동영상을 워낙 편리하게 볼 수 있다 보니 책을 잃지 않게 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미국 사회 "다윗이 혁신적인 것을 들고 나와 골리앗을 이길수 있는 게 미국사회입니다." 임 대표는 회원제 우편 비디오 대여사업자 넷플릭스의 예를 들었다. 이 회사는 월정액으로 20불을 내면 2만여편의 DVD를 한번에 3장 이내로 연체료 걱정없이 신청할 수 있으며,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우편으로 다시 재발송하는 영업방식을 취했다. 온라인 사용 편의성, 롱테일 콘텐츠를 미국 전역에서 단 하루만에 회원들의 집으로 공급하는 신속성을 통해 해당 분야의 지배적 사업자인 블록버스터를 추월하기도 했다. 4만명 이상의 종업원을 두고 연 매출 5~6조를 달성하던 동종의 공룡기업 블록버스터를 980명의 직원이 일한 넷플릭스가 넘어섰고 지금의 넷플리스는 1천4백만 가입자와 4조원의 시총규모를 가진 새로운 공룡이 됐다. "블록버스터의 경우, 최근의 토요타도 마찬가지로, 오만에 빠지면 죽는 것이 미국 시장입니다." 그 외에 임 대표는 미국 시장의 풍토로 '선순환 구조의 확립'을 들었다. 소규모 벤처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구글같은 상층부의 주요 기업들로부터 구매돼 널리 활용되고 기술의 원천인 엔지니어들이 우대받는 '기회의 땅' 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경쟁 결과 끊임없는 인수합병이 이뤄지며, 산업의 지평이 요동치는 것도 현지 시장의 특성이라고 전했다. 강연 내내 스마트폰과 트위터 등 현지 IT 트렌드에 대해 예찬했던 임 대표는 "너무 좋은 콘텐츠가 많아 미칠 지경"이라며 "이는 이를 사용해본 이들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임 대표는 "미국의 인터넷 사회는 너무나 풍성한 좋은 콘텐츠들이 흘러 넘치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곳"이라고 전했다. 이런 콘텐츠들을 보다 여유있게 향유하기 위해 "내게 시간이 2배 있었다면"하는 생각을 할 정도라는 임 대표는 "뉴욕타임즈는 종이보다 LCD에서 더욱 멋지다"는 개인적인 품평을 빼놓지 않았다." ◆ 한국이 근본적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선 한국은 선순환 구조가 없다는 게 임 대표가 꼽은 아쉬움이다. 그는 "글로벌 시대에서의 생존은 국경을 넘어 정보를 습득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 따라 갈린다"고 강조했다. 높은 사회적 위치가 저절로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임정욱 대표 동영상 중계는 막바지에 급작스레 중단됐다. '언어 같이 기본적인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임 대표의 '명쾌한 진단'이 막바지에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현장에 있었던 90여명의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계가 중단되기 직전 임 대표는 "닷컴버블 당시와 달리 지금 모바일로 이행해가는 미국의 인터넷 붐은 진짜"라면서 "페이스북이 올해 1조를 상회하는 매출을 올릴 것으로 전망되며, 이러한 격변기에 기회를 잡지 않으면 어찌하냐"고 국내 IT산업 종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권유했다. 사실 한국 IT의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기 위한 방안은 쉽게 풀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정보 수집에 힘 기울이고, 열린 마음으로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강연 중 그가 던진 화두와 큰 차이는 없으리라 짐작된다. 모바일 인터넷과 SNS 열풍에 무심한 이들이 들었으면 '예찬 일색'으로 비춰졌을 지 모를 임 대표의 세미나는 글로벌 시장의 현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은 무엇인가 생생하게 들려줬다는 것 만으로도 의미있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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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