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비즈니스 정상외교 빛났다 -UAE 원전 수주 막전막후

비즈니스 정상외교 빛났다
UAE 원전 수주 막전막후
2009-12-28 오전 11:45:41 게재

이 대통령, 올 5월부터 진두지휘
UAE, 전방위 설득에 한국 낙점

역사상 최대규모(약 47조원) 해외수주를 기록한 UAE 원전사업은 민간과 공기업, 정부의 피 말리는 팀워크가 만든 ‘역전 수주’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비즈니스 정상외교’가 빛을 발했다.
정치인 대통령이 아닌 사막에서 맨몸으로 ‘신화’를 일궈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상 프랑스로 공이 넘어가던 순간에도 발주권자의 속내를 읽고 수주를 포기하지 않았던 ‘CEO 본능’. 외교관례나 국가원수의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6번이나 UAE 왕세자에게 직접 전화하며 ‘한국 컨소시엄’의 ‘신뢰’를 강조한 것은 ‘정치가형 정상’으로선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스로 넘어간 공 = 올 초 UAE가 560만MW 원전 발주 프로젝트를 공개입찰에 내놓자 세계 원전 업계는 요동쳤다. 400억달러란 건설비용도 매력적이었지만 2030년까지 1조달러(1200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세계 원전시장을 선점할 호기였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입찰사 3곳이 탈락하면서 수주전은 한국의 한전컨소시엄, 프랑스 아레바, 미일컨소시엄인 GE-히타치만 남았다. 당시 세계 원전업계는 프랑스의 낙점을 점쳤다. 세계시장의 50%를 점유한 원전선진국인데다 프랑스와 UAE의 ‘절친관계’가 그 이유였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미 UAE를 방문해 굳히기에 들어갔다.
수주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입찰 결정권을 가진 모하메드 왕세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방문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입찰과정이라 어렵다”는 정중하지만 ‘차가운’ 답변을 들어야 했다.

◆MB, 입찰사 CEO 역할 자임하다 = 이 대통령은 이때부터 사실상 원전 입찰사 지휘봉을 쥐었다. 20년전 현대건설 CEO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수시로 수주상황을 챙기며 “경쟁사와 차별화하려면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가격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또 “원전 이외에도 UAE가 원하는 협력관계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UAE측에는 모든 방면의 협력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입찰 관계자들에겐 △UAE는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로는 미래성장을 견인할 수 없으며 반도체, 조선, IT 같은 사업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한국은 이 분야에 경쟁력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이 UAE의 최적 협력파트너라는 3단 논법으로 접근해 세일즈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발주자의 니즈만 파악한다면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하다는 이 대통령의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역전의 움직임이 포착되다 = 이 대통령의 이런 ‘발상의 전환’은 적중했다. 9월초 UAE는 입찰발표 시기를 늦췄고 3개 컨소시엄 모두 ‘계속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10월초 프랑스가 다시 막판에 저력을 보이고 있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파격적 제안을 했다는 소문도 나왔다.
11월초 이 대통령은 최후의 카드를 던졌다. 11월 초순 유명환 외교부장관을 급파했다. 연이어 국방장관과 지경부차관을 비밀리에 보내 다각적인 협상에 임하게 했다. 협상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다시 왕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전 외 한국이 잠재력을 가진 분야에서 전폭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며칠 뒤 이 대통령은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고 3일 뒤 한승수 당시 총리와 최경환 지식경제부장관을 비롯한 정부협상단을 보냈다.

◆코펜하겐서 희망메시지 듣다 = 12월 입찰경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이 대통령은 왕세자에게 △최근까지 건설경험이 있는 한국형 원전이 안전하며 △경쟁사에 비해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비용도 저렴하며 △경제-안보 등 분야에서 전폭적인 협력관계를 갖겠다며 사용가능한 모든 카드를 쏟아냈다. 특히 인접한 핵잠재보유국 이란과 영토문제로 긴장관계를 갖고 있던 UAE에 북한과 대치중인 한국의 국방경험 전수제안은 프랑스나 미-일컨소시엄이 흉내낼 수 없는 제의였다.
결국 코펜하겐 방문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희망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 대통령은 코펜하겐에 머물던 18일 숙소에서 왕세자의 최종 통보전화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코펜하겐에서 귀국하던 기내에서 68번째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평소 주량보다 훨씬 많은 쌀막거리를 마셨다. 그 이유가 UAE 왕세자로부터 걸려온 전화 때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에 거의 없었다.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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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4일 목요일

[연말기획]⑤온라인쇼핑, 유통의 중심에 서다

[연말기획]⑤온라인쇼핑, 유통의 중심에 서다
이장혁 기자 hymagic@zdnet.co.kr
2009.12.24 / AM 09:53

[지디넷코리아]지난 1990년대 중반은 인터파크, 롯데닷컴 등 온라인쇼핑몰을 비롯해 TV홈쇼핑이 본격적으로 태동된 시기다. 이후 온라인쇼핑시장은 꾸준히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오게 된다.

 

올해 유통업계의 큰 이슈 중 하나는 온라인쇼핑시장이 계속해서 큰폭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반기 이베이의 G마켓 인수가 발표되면서 실질적으로 전자상거래 시장의 양강 구도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업계에서는 공룡쇼핑몰의 탄생으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론칭한 11번가가 G마켓, 옥션에 이어 전자상거래 시장 3위로 안착했으며 GS샵, CJ오쇼핑, 롯데닷컴 등 전통적인 오프라인 유통업체를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쇼핑몰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내세우며 성장을 지속해갔다.

 

이에 온라인쇼핑시장규모는 오프라인 백화점 규모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인터넷 쇼핑몰의 경우 오프라인 시장 성장률보다 평균 4~5배가 높게 나타났다.

 

지난 2005년 인터넷쇼핑 시장 규모는 15조 2천억원 수준이었던데 반해 2006년 17조 8천억원, 2007년 20조 3천억원, 지난해의 경우 23조원에 달할 정도로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2008년 온라인쇼핑 소매시장 점유율이 9.4% 정도로 백화점(8.0%)을 뛰어넘는 규모와 위상이 확립됐다"고 말했다.

 

■경기불황·신종플루···온라인쇼핑시장 견인차

 

지난해 경기불황 여파로 소비자들은 오프라인 시장보다는 쇼핑시간이나 제품가격이 좀 더 저렴한 온라인쇼핑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시간 절약은 물론 합리적은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점점 증가했으며 상품 비교 및 제품 이용 후기 등을 면밀히 살펴본 후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제품 구입이 가능한 온라인쇼핑을 주로 이용하게 된 것.

 

온라인쇼핑의 취급품목이 다양해지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것은 물론 상품의 품질도 지속적으로 향상되면서 소비자들의 신뢰도도 증가하게 됐다. 특히 온라인쇼핑의 고질병으로 인식되던 배송문제나 교환·반품·환불제도 등이 일정부분 정착되면서 온라인쇼핑 이용고객을 큰 폭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 온라인 쇼핑몰 월간 방문자 수(자료=랭키닷컴)
온라인쇼핑의 ▲구매 편리성 ▲저렴한 가격 ▲풍부한 상품 정보 ▲상품 품질 향상 ▲배송 시간 단축 ▲편리한 결제 ▲교환·환불·반품제도 확립 등이 성장에 직접적인 성장 견인차 역할을 했다.

 

또한 올해 유통가를 압도한 키워드 '신종플루'도 온라인쇼핑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이다.

 

옥션, G마켓 등 오픈마켓은 물론 인터넷종합몰, TV홈쇼핑 등 신종플루 관련 상품이 히트상품군으로 오르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마스크나 손세정제는 물론 면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홍삼까지 판매순위 1~3위를 차지하는 등 평상시 잘 팔리지 않았던 상품군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온라인쇼핑···고객과의 접점 강화가 최우선

 

올해 신종플루, 경기불황 등으로 큰 폭의 성장세를 거듭한 온라인쇼핑이 내년에도 성장세를 꾸준히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가 발표한 '2010 유통업 전망 보고서'에서는 내년들어 온라인쇼핑몰이 더욱 약진할 것으로 전망했다. 내년 온라인쇼핑몰은 오프라인과 연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 15%의 고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내년에는 온라인쇼핑몰이 대형마트에 이어 매출규모 2위로 뛰어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쇼핑의 경우에도 고객맞춤형 CRM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물론 상품의 고급화 브랜드화를 통해 고객 신뢰도를 극대화 하는데 중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인터넷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한 새로운 온라인 서비스 출시도 고려대상이다.

 

이를 통해 인터넷의 성장과 더불어 온라인쇼핑 시장 성장은 물론 T커머스, M커머스 등 신규 서비스나 솔루션을 개발해 지속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김윤태 온라인쇼핑협회 사무국장은 "올해 온라인쇼핑 매출증가율은 연말까지 14.4%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내년에도 인터넷쇼핑 11.5%, 오픈마켓 11.3%, TV홈쇼핑 4.6% 성장세를 이어가 오는 2015년에는 소매시장 매출액 1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TV홈쇼핑은 온라인쇼핑몰의 영향으로 국내시장에서 성장의 한계가 예상되나 수익성 중심의 영업과 해외진출 가속화로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TV홈쇼핑은 고객별 타깃마케팅을 강화하고 상품의 다양화 및 차별화 그리고 자체 브랜드화에 승부를 건다는 전략이다. 본격적으로 T커머스를 활성화 시키고 기존에 축적된 노하우를 기반으로 해외시장 진출에도 힘을 쏟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민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장은 "2010년 국내 유통업계는 온라인 쇼핑의 약진 등 업태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유통업계도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인터넷쇼핑몰의 산 증인···이상규 인터파크 대표
 
▲ 이상규 인터파크 대표
미국에 제프 베조스(Jeff Bezos : 아마존 설립자)가 있다면 한국엔 이기형 회장이 있다. 그리고 13년간 그의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해온 또 다른 공로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상규 대표다. 인터넷쇼핑몰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고 사업초창기 각종 실무 업무부터 국내 최초의 전자상거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파크INT의 최고경영자 역할까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 온 그는 국내 인터넷쇼핑몰 역사의 산증인이자 최고의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지난 1996년 6월1일 대한민국 최초로 인터넷쇼핑몰을 오픈한 인터파크는 1997년 10월 1일 데이콤에서 자회사로 분사하여 데이콤인터파크로 설립됐으며 1999년 코스닥 등록을 앞둔 5월 데이콤에서 독립해 인터파크로 사명을 고치고 출범했다.

 

인터파크의 오픈은 다른 기업체들에게 새로운 시장에의 참여동기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국내에 전자상거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1996년 2개에 불과하던 국내인터넷 쇼핑몰 수는 5천여 개로 급증했다. 연간 100억 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거래액은 20조에 이르러 인터넷쇼핑몰은 이제 대형마트, 백화점과 함께 3대 유통채널로 자리매김했으며, 2008년 인터넷 이용 인구 3천536만 명 중 60% 이상이 인터넷쇼핑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인터파크INT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상규 대표는 또 한번 업계의 서비스와 UI 트렌드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먼저 이벤트 배너와 상품이미지 중심의 무거운 디자인을 벗고 콘텐츠 위주의 가볍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홈페이지를 파격적으로 개편한 것. 홈페이지 길이가 기존의 절반으로 축소되면서 각 부문의 서비스채널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응답속도도 크게 단축되었으며 '동일상품비교하기' 등 검색기능은 입체적이며 빠르고 편리해졌다.

 

또, 고객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되는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경영철학에 따라 인터넷쇼핑몰 최초로 2009년 1월부터 '무료반품/교환 쿠폰 서비스'를 시작했고, ▲'할인쿠폰, I-포인트최대 20% 중복할인' 서비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판매자에게 실제번호 대신 가상의 전화번호를 전달하는 '안심번호서비스' ▲'당일퀵배송' ▲구매실적에 따라 다양한 문화 혜택을 즐길 수 있는 '하트박스' 등을 선보였다.

 

이상규 대표의 다양한 도전은 동종업계에 벤치마킹 모델이 되어 오픈마켓의 서비스 만족도와 신뢰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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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트위터 … 온라인 모금 …‘사이버 기부’클릭하세요

기부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인터넷·휴대전화와 같은 새로운 소통 수단은 소수의 거액 기부 문화를 다수의 소액 기부 문화로 바꿨다. 이웃을 도울 생각이 있다면 이제 트위터를 하면서 메시지를 올릴 때마다 1원씩 기부할 수 있다. ‘행복주식거래소’ 홈페이지(happyexchange.chest.or.kr)에 들어가면 이웃들의 사연을 보고 주식을 고르듯 돕고 싶은 대상을 선택할 수 있다. 연세대 경영대는 ‘블루 버터플라이’라는 온라인 소액기부 시스템을 구축해 출범 한 주 만에 17억원을 모으는 기적을 만들었다.

#대학 동문에게 온라인 기부 받아

‘1000원 한 장이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연세대 ‘블루 버터플라이’ 홈페이지.
연세대 경영대와 상경대 동창회는 최근 동문을 대상으로 ‘블루 버터플라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쉽게 말하면 1000원 기부 캠페인이다. 일회성 모금 운동이 아니다. 새로 구축한 온라인 기부시스템인 블루 버터플라이 홈페이지(www.bluebutterfly.co.kr)를 통해 동문들이 꾸준히 기부를 한다. 동문 30명이 매일 1000원씩 4년간 기부하면 재학생 한 명의 학비를 전액 책임질 수 있다. 동문들은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순간 고유의 나비 번호를 받고, 지원한 학생들의 멘토 역할까지 한다. 블루 버터플라이 기부 캠페인은 큰 돈이 아니어서 손 부끄러워 기부에 동참하지 못했던 동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동문들이 아무 때나 손쉽게 기부를 할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가 적중한 것이다. 이달 11일 캠페인을 시작한 지 일주일여 만에 17억여원을 모았다.

이 캠페인이 계속 이어지면 동창회가 재학생 후배 전원에게 전액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블루 버터플라이’란 홈페이지 이름도 아마존의 나비 날갯짓이 미국 플로리다의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에서 따왔다. 이처럼 전 동문이 참여하는 기부 형식은 기부 문화가 앞선 미국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 글 1개 1원씩 3000만원 모아

지난 11월 11일 트위터 사용자들 사이에서 ‘글을 쓸 때마다 1원씩을 기부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트위터는 PC와 휴대전화로 짧은 글을 서로의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일종의 ‘미니 블로그’다. 한 달 만에 400여 명이 참여해 1000만원이 모였다. 22일 현재 970명이 3000만원가량을 모금했다. 이 캠페인은 트위터 김현성(38)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김씨는 지난 9월 자신의 트위터 방문자가 1000명이 되자 10만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김씨는 트위터에 “방문자 한 명당 1원을 기부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한 달 만에 400명이 답했다. 김씨는 “2000년 결혼할 때 축의금의 1%를 기부하면서 소액기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트위터 덕분에 1원 기부 아이디어가 현실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트위터가 없었다면 그저 한 사람의 소액기부자로 머물렀겠지만 새로운 소통 수단 덕에 더 많은 기부를 이끌어낸 셈이다. 굿네이버스의 양진욱 나눔사업본부장은 “인터넷 등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기부 방식이 늘어나면서 참여도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묻지마’에서 ‘맞춤형’으로 진화

10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하는 ‘행복주식거래소’ 홈페이지에 사연 하나가 올라왔다. 경북 경산시 구정선(73) 할머니의 사연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외동아들이 할머니를 보살피지 않아 월 27만원의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으로는 방세도 감당할 수 없다는 짧은 글이었다. 한국거래소 노동조합은 행복주식거래소에서 행복주식 100주(50만원)를 구입해 구 할머니에게 기부했다. 노동조합 박완선 사무국장은 “같은 ‘거래소’라 평소 관심을 갖고 홈페이지를 보다 구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내 기부금이 누굴 위해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있어 더 좋았다”고 말했다.

자선단체를 통한 기부는 내 돈이 누구를 돕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행복주식거래소를 통하면 기부자들이 온라인에서 사연을 보고 도움 받을 사람을 직접 고른다. 인터넷 덕분에 기부가 ‘묻지마’에서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강기헌·정선언 기자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내년엔 할리우드 대작ㆍ드라마ㆍ싱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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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된 광고 촬영 끝에 이뤄진 인터뷰. 반갑게 인사하는 비(본명 정지훈ㆍ27)는 지친 기색 없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첫 질문을 떼기도 전에 "빨리 여자 친구 생겨서 장가가고 싶다"는 너스레도 떨었다. 이 말은 요즘 들어 비에게서 부쩍 자주 들을 수 있는 '희망 레퍼토리'다.

비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이런 자신감은 올해 성과가 그만큼 좋다는 징표일 것이다.

월드투어 미국 공연 무산에 따른 법적 소송을 끝냈고, 2년 만에 아시아 투어를 재개했으며, 이달 말에는 3년 만에 세 번째 미국 단독 공연을 개최한다.

직접 프로듀싱한 아이돌 그룹 엠블랙도 데뷔시켰으며, 11월 할리우드 첫 주연작인 영화 '닌자 어쌔신'은 개봉과 더불어 미국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며 배우로서의 입지도 다졌다.

미국 CNN이 그를 특집으로 조명했고, 그를 담은 디스커버리채널 다큐멘터리는 '아시안 TV 어워드'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 사업가보다 연예인으로 갈 길 멀어

매년 쉼 없이 화제를 만들어내는 그는 올해가 인생을 배운 해라고 했다. 진정성 있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안목을 갖게 된 해, '비'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강하게 믿었던 자신에 대한 기준선이 철저히 깨진 해였다고도 했다.

"그래서 정신건강이 악화하기도 하고, 큰 희망을 품기도 했어요. 저는 10년 주기로 변화가 생기네요. 1989년 집이 풍족한 삶에서 부족한 삶으로 바뀌었고, 1999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2009년에는 소송이란 악재도 있었지만, 연말에는 영화 개봉 등 좋은 일들이 생겼잖아요. 인생은 정말 마라톤 같아요."

비는 2007년 월드투어 미국 공연 무산과 관련한 2년간의 분쟁을 지난 6월 끝냈다. 그렇기에 8월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 홍콩, 인도네시아 등지를 돈 '레전드 오브 레이니즘(Legend of Rainism)' 투어는 감회가 남달랐을 터.

"무대의 소중함은 늘 느꼈죠. 하지만 무대란, 준비되면 오르고 다시 내려오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공연을 할 때면 무대 설치 등 저를 위해 뛰는 분들의 고생도 헤아리게 됐죠. 무대에 한번 서는 게 요즘은 더없이 고맙고 행복해요. 미국 공연도 벌써 설레고요."

비는 가수로서 신인상, 대상도 타봤기에 이제 국내에서는 이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해외로 나가 더 큰 시장을 뚫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랬기에 지난 9월 엠블랙도 데뷔시켰다.

그는 "엠블랙이 내가 직접 프로듀싱하는 마지막 음반일 것"이라며 "내가 가수와 배우로서 갈 길이 멀다는 걸 깨달았다. 박진영 형처럼 사업가로서는 자질이 부족하기에 연예인으로 나의 최대치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 美서 '잽' 날리자 좋은 제안 줄이어

비는 '닌자 어쌔신'이 개봉한 뒤, 2002년 1집을 막 끝냈을 때처럼 신인의 기분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데뷔 8년차임에도 매번 자신의 마음가짐을 데뷔 당시의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도 높이 살 재주다.

몇 년 전 박진영이 뉴욕의 심장부인 타임스퀘어에 서서 "5년 후 비의 얼굴을 타임스퀘어에 넣어놓겠다"는 말도 '닌자 어쌔신' 대형 포스터가 붙으며 현실이 됐다.

"당초 이 영화의 목표는 미국에서 2천만 달러, 아시아 통합 5천만 달러 수익이 목표였어요. 그런데 투자금도 회수됐고 그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대요. 미국에서 주당 70편의 영화가 개봉되는데, 제 영화 때는 '2012', '뉴 문' 등 대작들이 많았죠. 당일 개봉한 영화 6편 중 박스오피스 1위,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6위를 차지해 만족해요. 이제 잽 한번을 날렸으니, 카운터 펀치도 준비해야죠."

비는 이 영화 개봉 후 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에서 '좋은 제안'들이 쏟아져 출연 여부를 결정을 하는 데도 고민이 된다고 했다. 대단한 감독이 연출할 세계적인 프로젝트 등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그중 한 작품은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로 7-8명이 주요 배역을 맡는다고 했다.

"주연 욕심보다 다음 단계로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블록버스터에 조연급으로라도 출연하고 싶어요. 미국의 스타들도 주연과 조연을 오가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브래드 피트, 콜린 파렐 등의 배우들과 연기한다면 그것도 큰 이력이 될 테니 주저 없이 선택할 겁니다. 아직은 배역의 한계가 있겠지만, 어느 순간 벗어날 때가 있을 겁니다."

최근 만난 청룽(成龍)은 비에게 이같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난 40대에 할리우드에 진출했지만 너는 나보다 20년이 빠르다. 넌 할 수 있다. 5년 후를 내다보라"고. 비는 "'러시아워' 등으로 유명해진 청룽은 미국인 누구나 안다. 리샤오룽(李振藩)과 함께 진정한 월드스타"라고 덧붙였다.

비는 할리우드 영화와 함께 드라마 출연에도 욕심을 냈다.

"내년에는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고 싶어요. 영화를 촬영하면 7-8개월이 소요돼 다시 1년 공백이 생기니 아시아권 팬들은 영화보다 드라마에 출연하길 원하죠. 한ㆍ일, 한ㆍ중 합작 드라마라도 좋으니 인간 냄새 나는 드라마를 꼭 할 겁니다."

그렇다면 가수로서 월드와이드 음반을 내고 미국 팝 시장에 진출할 계획은 잠정 보류인지 물었다.

비는 "영화를 선택한다면 현재로선 월드와이드 음반은 포기해야 한다"며 "하지만 디지털 싱글로 팬서비스를 하고 싶다. 같은 곡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른 언어로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 춤 영화 출연과 좋은 아버지가 꿈

내년 계획을 털어놓던 그는 문득 자신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또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부담되기보다 근접하려고 애쓰기에 꿈과 의욕이 생긴다고도 했다.

"요즘 등산을 다니는데, 산도 빨리 올라가면 금방 탈진하잖아요. 천천히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와야죠. 또 이제는 제가 말만 하면 안돼요. 보여줘야 하죠. 미국 TV 쇼 출연, 박스오피스 몇 위가 중요하지 않아요. 오히려 영화 배급사의 홍보 덕에 현지에 제 팬클럽이 자생적으로 생긴 게 더 고무적이죠. 아시아 스타일인 팬미팅 등을 미국에서 시도해보려고요."

"이제 내 갈 길을 가야 한다"는 그에게 연예계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미국 연예지 할리우드리포터 인터뷰를 하는데, 남북문제, 최근 세상을 뜬 한국의 유명 모델에 대해 묻더군요. 그들은 절 인터뷰하며 정치 분야까지 한국을 공부하고 조사했어요. 저로 인해 그들이 한국을 알아가는 게 신기했어요. 제가 한국인이니 잘못하면 한국, 나아가 아시아가 욕먹을 수 있잖아요. 어깨에 그러한 책임감은 이미 있어요."

또 가난과 어머니의 죽음 등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성공 스토리로 화제가 됐기에 훗날 자신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어보라는 제안도 했다.

그는 "그것보다 내 몸이 녹슬기 전 춤 영화를 꼭 찍고 싶다"며 "아시아에서 춤 영화가 안된 건 춤을 잘 추면 연기력이 부족하고 연기자는 춤의 끝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난 지금 연기와 춤을 갈고 닦으니 언젠가 휴머니즘이 있는 춤 영화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희망사항. 늘 '결혼이 준비된 남자'라고 말하는 그가 그리는 가정은 스타답지 않게 소박했다.

"주말이면 전화기를 끄고 아이들과 도시락 싸서 놀러가는 가장이 되고 싶어요. 제 꿈이 좋은 아버지거든요. 집안이 풍족하지 못해 우리 가족은 사랑할 시간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장사했고 아버지도 힘들게 일하셨죠. 나이 들어 작은 콘서트홀에서 쇼를 하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을 해도 괜찮아요. 100일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가족에 충성을 다하려고요."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광고 `그녀는 프로다`는 내 다짐 담은 것"

삼성 첫 女부사장 제일기획 최인아씨

"여성으로는 최초이지만 사실 남자들은 이미 걷고 있는 길이잖아요. '내가 남자여도 가능했을까' 하고 자문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

최근 삼성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에 오른 최인아 제일기획 부사장(48 · 사진)은 20일 "'자리'에 취하는 일을 경계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84년 카피라이터 공채로 입사,26년 만에 국내 최대 광고회사의 부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2000년 최초의 여성 임원(이사보)에 이어 10년 만이다.

최 부사장은 삼성에서 늘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2001년 첫 여성 상무보,2002년 제일기획 1대 마스터(광고 대가),첫 여성 전무(2007년) 등 이력이 화려하다. "제 자신이 하나의 '샘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로 인해 기존에 없던 일들이 생기고,또 이로 인해 저는 뒷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거죠."

사실 제일기획은 최근 2~3년 전부터 크리에이티브(창의성)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낙회 사장(공채 2기)과 최 부사장(공채 8기)이 각각 CEO(최고경영자)와 제작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말단 사원으로 출발해 현장을 두루 경험한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는 최상의 파트너인 셈이다.

최 부사장은 자신의 손을 거친 수백편의 광고 중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베스띠벨리의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와 삼성카드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를 꼽았다. 이들 카피는 사실 그가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스스로에게 되뇌였던 말이기도 하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리천장'을 느꼈고 앞이 막혔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며 "(회사가) 나를 쓸 수밖에 없게끔 만들자고 수없이 다짐했다"고 말했다.

최 부사장은 제작본부장(전무) 시절 꼼꼼한 스킨십으로도 유명하다. 매분기 인사평가 때마다 팀장들에게 팀원들의 장단점을 A4용지 한 장에 빼곡히 적도록 했다. 직원들이 평소에 고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승진한 직원의 가족들에게 카드도 보냈다. "누군가 승진하면 아내나 부모님께 카드를 직접 썼습니다. '주말도 반납하고 일한 OO아빠를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요. 다들 좋아하시더군요. "

최 부사장은 앞으로 제일기획을 '기회가 많은 조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조직에서 본인을 알아준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광고산업이라는 게 공장이나 기계를 돌리는 곳이 아니잖아요. 결국 개개인이 회사입니다. 후배들이 잠재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일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가 광고계에서 시장 점유율 이상의 지배력을 보이는 것도 구성원들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취미는 독서와 카운슬링.책에 빠져들 때와 상대방의 고민을 들어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여자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것.그는 "돌이켜보면 그동안 수없이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선배들이었다"며 "헤맬 때는 외롭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면 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2010년 SW 이슈는 ‘그린IT·클라우드·모바일웹’

2010년 소프트웨어 분야의 산업의 이슈는 올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발간한 ‘SW Insight 정책리포트 12월호’에 따르면 내년도엔 ‘그린IT 2.0(IT for Green)’과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웹 애플리케이션’이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의 이슈가 내년에도 이어지고, 특히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면서 모바일 웹 애플리케이션 분야가 새롭게 부상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이번 잘 ‘국내 SW시장 2009년 회고와 2010년 전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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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IT업계 종사자와 관련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2009년과 2010년 IT, 비즈니스 이슈 설문조사 결과, 2010년 주요 IT이슈로는 ‘그린IT 2.0(IT for Green)’, ‘클라우드 컴퓨팅’ , ‘모바일 웹 애플리케이션’, ‘ 산업과 IT융합 확대’등이 선정됐다. SW시장 세부 분야별로 살펴보면, 10대 IT이슈에 덧붙여 패키지SW분야는 ‘windows 7’,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IT서비스 분야는 ‘IT서비스 품질개선’, ‘에너지관련 IT기술개발’, 임베디드SW분야는 ‘모바일OS개방/개방형 플랫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SW시장의 주요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비즈니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이슈로는 ‘경기 전망의 불확실성 고조’,  ‘IT융합 비즈니스 확대와 고도화’, ‘금리 인상등의 출구전략 시행’ 등이 주요 이슈로 선정됐다.

보고서에서는 향후 국내 SW업계를 이끌어갈 3대 키워드는 ▲그린, ▲모바일, ▲IT융합이 될 것으로 전망하며, 이 3대 키워드는 R&D, 투자, 고용, 매출 등 소프트웨어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범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국내 산업 구조를 친환경, 지식정보화 구조로 전환하는데 기반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편, 올해 SW산업의 최대 비즈니스 이슈로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그린 비즈니스가 가장 큰 비즈니스로 선정됐고, ▲제조업과 IT융합 본격화, ▲비용절감 솔루션 부상, ▲신성장동력 추진이 그 다음으로 SW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비즈니스 이슈로 선정됐다.

2009년 SW산업의 최대 IT이슈로는 ▲그린IT로 `08년도 4위에서 `09년도에는 1위로 상승하면서 그린IT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바일 컴퓨팅/애플리케이션 확대, ▲개방형 모바일 플랫폼이 그 다음으로 2009년 주요 IT이슈였다.


도안구

IT 분야 중 소통과 관련된 내용에 관심이 많다. 일방 소통에 익숙하다보니 요즘 시대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정말 제대로 된 소통을 하고 싶다.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오케이아웃도어 닷컴 장성덕 대표 “뛰면서 걸으면서 항상 생각한다”

오케이아웃도어 닷컴 장성덕 대표 “뛰면서 걸으면서 항상 생각한다”
  • 국내 아웃도어용품 유통시장에 신흥강자가 급부상하고 있다. 주인공은 온·오프라인을 통해 아웃도어용품을 유통하고 있는 오케이아웃도어닷컴(대표 장성덕)이다. 이곳은 최근 레저용품 분야의 인터넷쇼핑몰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의 저력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뛰면서, 걸으면서 생각한다.”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을 이끌고 있는 장성덕 대표의 좌우명이다. 항상 생각하고 곧 바로 행동에 옮긴다는 의미다.

    장성덕 대표는 일본에서 예술대학(방송학과)을 졸업하고 삼성물산에서 해외 비서 파트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2000년 자본금 4000만 원으로 등산정보 사이트 ‘오케이마운틴’과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을 열었다. 등산 마니아에 스키, 마라톤은 수준급. 철인 3종 경기까지 참가하는 만능 스포츠맨의 발상다웠다.

    그런데 당시 레저용품 전문몰과는 달랐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었다”는 그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은 오픈 10년을 맞는 내년에는 매출액 1000억 원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해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 장성덕(43) 오케이아웃도어닷컴 대표는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의 성공비결은 바로 ‘직사입’ 노하우와 ‘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발상도 획기적이다.어떤 것이든 시스템화하면 곧 돈이 되더라”고 말한다.

    협력업체들은 ‘즉시 결제 시스템’을 통해 아우르고 있다. 자금 회전에 목말라 있는 제조업체에 즉시 결제는 단비와도 같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자체 개발한 재고관리 시스템은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인터넷만 연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온·오프라인상의 4만여 종류(컬러 사이즈 포함) 제품의 위치, 흐름, 재고 현황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직사입을 하려다 보니 제작 원가를 알아야 했고 결국 이제는 ‘락마스터’ ‘바디핏’이라는 자체 의류브랜드도 생산하는 경지에 올랐다.

    장대표는 재고를 맞추기 위해 프로그램만 1000번 이상 뜯어고쳤다. 지금은 웹상에서 직원들의 출·퇴근은 물론 외근현황 및 월급까지도 웹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유비쿼터스 쇼핑몰 회사를 실현한 셈이다.

    그의 경영 노하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을 시스템으로 승부하고 그외에는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비결이다.

    하지만, 그에게 전혀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크게 매장을 내려고 동대문 운동장 지하 1층을 빌렸을 때 경쟁브랜드가 많이 생기면서 제품 판매량이 급작스럽게 주춤하면서 출혈이 심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가에게 두 번 이상 반복하는 실수는 죄악이라는 생각’으로 피나는 노력끝에 위기를 극복했다. 이제는 전화위복으로 그 매장에서만 매출이 100억 원 가까이 나온다.

    그는 내년에는 G마켓 11번가와 같은 형태의 아웃도어 전문 오픈마켓을 열 계획이다. 물론 수수료를 완전무료하는 파격적인 정책으로 대결구도를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의 파격 행보는 ‘아웃도어 시장의 블랙홀’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작단계에 불과하다는 게 장대표의 생각이다. 아직도 아웃도어 시장은 무한한 성장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장 대표는 아웃도어가 패션의 시작이자 근본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통시장에서 백화점, 할인점, 오픈마켓, 멀티숍으로 나눌 때 오케이아웃도어닷컴이라는 채널을 새롭게 자리매김해 국내 최대 기업으로 성장하고 싶다”며 “핵심역량을 열어놓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스포츠월드 글·류근원 기자 사진·김두홍 기자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재미갑부 황규빈 '도전 인생'

재미갑부 황규빈 '도전 인생'
[Who] 한국 벤처社 '젤라인' 인수한 美텔레비디오 황 회장, 이젠 고국서 'PLC 신화' 쏜다
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0911/h2009111602322821540.htm

이노패스트 [1] 네오세미테크

태양광 막히면 LED로 뚫는다
그린에너지‘투톱 기술’ 경쟁사 압도

“2011년 매출은 적게 잡아도 1조원은 넘을 겁니다.” 인천에 본사를 둔 네오세미테크의 오명환(50·사진) 사장이 내놓은 2년 후의 매출 전망치다. 그런데 올해 이 회사의 매출액 예상치는 2500억원. 불과 2년 만에 매출을 네 배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거다. 당장 내년 경기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에.

“매출 1조원, 절대 허풍이 아닙니다.”

그가 과거 자료를 내민다. 2002년 이후 2007년까지 이 회사의 매출은 100억~300억원대였다. 그러나 지난해엔 1032억원으로 전년(314억원)의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이게 올해는 지난해의 2.5배로 뛰었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2년간 두 배씩 성장해 1조원 매출도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그의 전망은 그렇게 단순한 어림셈에서 나온 게 아니다. 기술과 가격 경쟁력이 그의 자신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린 에너지 열풍이 불면서 각광받고 있는 산업이 태양광 발전과 발광다이오드(LED) 분야입니다. 남들은 하나를 잘하기도 어렵지만, 우리는 두 분야에서 핵심기술을 가지고 있지요.”

이 회사는 태양전지와 LED의 재료로 사용되는 반도체 잉곳(덩어리) 전문 제조업체다. 오 사장은 “LED용과 태양전지용 반도체를 모두 생산하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태양광용 실리콘반도체다. 매출의 80%가 여기서 나온다. 문제는 기술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품목이라는 거다. 경쟁이 치열해져 금세 ‘레드오션’이 될 위험이 있다. 태양전지 시장의 과잉 공급이나 각국의 정책 변경 등으로 비틀거릴 수도 있다.

그래도 오 사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태양광용 반도체 잉곳의 매출이 주춤하면, 즉각 LED용 반도체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네오세미테크는 최근 대만의 두 개 회사에 LED용 반도체 웨이퍼 1억6400만 달러(약 1900억원)어치를 3년간 공급하기로 하는 등 공급 계약을 잇따라 맺었다. 또 언제라도 양산에 돌입할 준비가 된 첨단 반도체 잉곳 기술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하나가 막히더라도 제2, 제3의 동력이 준비돼 있다는 것이다.

네오세미테크가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수익력이다. 오 사장은 “우리 제품의 생산단가는 경쟁사보다 30~60%가량 낮다”며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도 내년에 4, 5공장을 짓는 건 품질과 가격 경쟁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의 비밀은 이 회사가 2002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연속공정법’이란 기술에 있다. 1300도의 고온에서 연속적으로 반도체 잉곳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잉곳 한 개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 300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됐다.

시간은 효율로, 효율은 곧 수익으로 이어졌다. 네오세미테크의 영업이익률(매출 대비 영업이익의 비율)은 지난해 35%. 즉 1000원어치를 팔아 350원을 남겼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 결산 국내 563개 상장사가 평균해 1000원어치를 팔아 38.7원을 남긴 것에 비하면 노다지를 캐고 있는 셈이다.

2000년 창업 후 2년도 안 돼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결정적인 것은 역시 오 사장의 전문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84년부터 LG전선(현 LS전선)에서 10여 년간 갈륨비소 연구에 매달렸다. 2000여 편의 해외논문을 독파했고, 갈륨비소로 박사논문도 썼다. 전 세계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 업체들과 상담하느라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었다. 지금도 도쿄 시내의 지리를 훤히 꿴다. 그러나 회사가 갈륨비소 연구를 중단하자 그는 독립했다.

“창업 후 처음엔 반도체용 장비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걸로도 벌이가 쏠쏠했지만 갈륨비소 반도체 개발에 대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갈륨비소는 초기 자금만 100억원 넘게 드는 까닭에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런데 벤처 붐 영향으로 투자자가 나서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결국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갈륨비소 반도체를 팔아 첫해부터 이익을 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회사를 한 단계 상승시키기 어려웠다. 이미 해외 선발 회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고, 추가 연구엔 끊임없이 거액이 필요했다.

그러다 2005년 네오세미테크의 갈륨비소 제조 기술을 잘 알고 있는 한 해외업체가 “태양광 실리콘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오 사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시에 투자와 개발을 했고, 이를 통해 1000억원 매출을 돌파할 수 있었다. 회사의 외형이 어느 정도 커지면서 안정적으로 신기술을 축적할 여력도 생긴 것이다.

그럼 세계시장에 네오세미테크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오 사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태양광·LED용 반도체에서 기술독립을 선언할 정도가 됐을 뿐”이란다. 태양광 반도체의 경우 해외업체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이 대부분이다. 또 갈륨비소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아직 5%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 시장 점유율 10%만 넘기면 그때부터 절반으로 끌어올리는 건 쉽다”며 “한국이 화합물 반도체의 강자로 부상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점은 보완하세요

창업자 한 사람 기술에 의존
회사 커지면 집단 역량 중요


네오세미테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가 회사를 창업했다. 그 때문에 최소한 생산기술 분야에서는 단기간에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갈륨비소 반도체에서 실리콘으로 제품 라인을 확장하면서 창업자의 기술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창업자는 원재료의 구매-가공-기술-설비에 이르는 가치사슬의 전 분야를 통달하고 있었기에, 경쟁자보다 원가 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그러나 매출이 커지면서 관련 기술의 범위가 넓어지고 경쟁구도가 확장되면 창업자 한 사람의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제는 기술역량을 집단화해야 할 시점이다. 미래가 기술에 달려 있는 회사에서 핵심 기술인력 그룹의 형성은 백년기업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토대다.

네오세미테크 경쟁력의 원천은 원가 우위에서 나온다. 갈륨비소-실리콘 가공 과정에서 원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신공법인 연속성장법과 관련한 특허 80여 개는 핵심 생존기반이다. 앞으로 상당기간 회사는 신공법 특허가 가져오는 ‘원가 우위’라는 열매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는 기술환경 속에서 신공법의 우위는 영속적일 수 없다. 일본은 40년을 앞서 기술과 특허를 축적해 왔고, 전열을 가다듬어 판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경쟁 우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특허전략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 즉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창업자가 조직을 다스리는 철학이다. 철저히 믿고 맡기면서 쓰라린 배신을 당한 적도 있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신뢰는 회사의 성장으로 보답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과거 중소기업 시절에는 창업자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규모가 커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을 믿고 맡기는 문화는 바람직하지만, 믿고 맡기면서 통제·평가하는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회사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현시점에서 단기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재무기능의 강화다. 주식시장 상장은 이해관계자의 범위가 훨씬 넓어짐을 의미한다. 최고재무관리자(CFO)의 역할과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시스템으로 구현해 재무상태를 경영진과 주주가 적시에, 투명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재무기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장회사는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갈륨비소라는 물질에 인생을 걸었던 창업자의 열정이야말로 네오세미테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이를 기업의 DNA로 만들어 조직에 체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기업문화 형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창업자의 철학과 열정을 직원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설계하고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파해야 한다. 이를 통해 창업자의 열정을 회사 전체가 공유하고 조직의 기업문화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

특별취재팀=금융증권팀 김준현 차장, 김원배·김영훈·조민근·박현영·한애란 기자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남산 반얀트리 서울` 점검차 방한 호권핑 회장

1984년 태국 푸껫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주석 광산터였다 버려진 이곳은 땅과 물이 오염돼 심각한 불모지로 전락했고, 주민들 역시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호권핑 반얀트리 회장은 푸껫의 잠재력을 미리 읽었다. 폐광산촌이었지만 조금만 가꾼다면 더 아름다운 곳으로 꾸밀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문화라는 코드를 입힌다면 세계적인 리조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헐값에 용지를 매입한 그는 이곳에 물을 끌어들여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호수와 해변을 따라 리조트를 지어 나갔다. 죽은 땅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덤프트럭만 수백 대. 야자수와 보리수 등 각종 나무도 옮겨 심어 남국의 싱그러운 정취를 맛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인테리어에는 태국 전통 문화를 담아냈다.

10년여에 걸쳐 2억달러를 투자한 그는 1994년 드디어 `라구나 푸껫`이라는 세계적인 복합 리조트 시설을 탄생시킨다. 이것이 바로 `반얀트리 신화`의 시작이었다.

푸껫에서 성공한 이후, 그는 몰디브, 빈탄 등지에서 잇달아 리조트를 열어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이제 서울의 허파 남산에 새로운 `도심형 리조트`의 모델을 세계 곳곳에 있는 `반얀트리 마니아`들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반얀트리 클럽&스파 서울의 `목업 룸 테스트(Mock-up Testㆍ건축 용어, 건물의 최종적 모형 점검)`를 위해 최근 방한한 호권핑 회장이 지난 6일 서울 청담동 반얀트리 홍보관에서 매일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로 만났다.

"저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기자와 만난 그는 대뜸 이 말을 건넸다. 글로벌 리조트 그룹을 이끌고 있는 데다 유명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에서 `경영 혁신 사례`로 꼽힌 경영인이기도 한 그의 첫마디로는 다소 의외였다.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경영인으로 꼽히는 그가 자신을 비즈니스맨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게 무슨 뜻일까.

"만약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했다면 반얀트리가 세계적인 리조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한다고 생각하며 경영에 임하고 있죠."

인터뷰 내내 호권핑 회장은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그의 스마트폰은 5분마다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하루에 이메일이 200개가 넘게 들어옵니다. 세계 곳곳에서 메일이 도착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과 메일로나마 만나는 것이 즐겁습니다.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죠."

호권핑 회장은 아무리 말단 직원이라 하더라도 보고 메일을 받으면 언제나 고맙다는 답장을 일일이 보내곤 한다.그를 맞이한 반얀트리 서울 직원의 귀띔이다.

◆ `굿 타임 이즈 커밍`

= 리조트 기업인 반얀트리는 세계 32개국에서 호텔ㆍ리조트 25개, 스파 68개, 갤러리 65개와 골프클럽 2개를 운영 중이다. 그의 성공 신화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일궈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지난해부터 찾아온 경기 침체가 리조트 산업에도 영향을 줬는지를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예스`라고 답했다. 여행객이 줄어 매출에도 영향을 미쳤고 리조트 관리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어려움`은 읽을 수 없었다. 어차피 위기란 늘 있어왔기 때문에 그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조트ㆍ호텔 산업에는 거의 해마다 위기가 찾아옵니다. 언제나 위기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해요. 이번에는 금융위기지만 사스(SARS), 조류인플루엔자(AI), 쓰나미 같은 위기가 거의 연례 행사처럼 찾아왔습니다. 대부분 위기는 피할 수가 없죠. 다만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호권핑 회장은 "굿 타임 이즈 커밍(Good time is coming)"이라는 말을 거듭했다. 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고, 곧 좋은 때가 온다는 것이다. 언제나 좋은 때가 올 것을 준비해야 위기를 더 빨리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는 위기 극복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인재 관리`를 꼽았다. 실제 그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단 한 차례도 감원을 했던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급여를 일부 깎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감원은 하지 않는다.

푸껫에 쓰나미가 몰려왔던 2004년은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꼽힌다.

당시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아수라장이 됐던 푸껫은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적막감이 감돌았다. 리조트 사업 자체의 존폐가 갈릴 정도로 투숙객도 급감했다. 직원들도 동요가 심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 한 명의 감원도 없었다. 대신 그는 직원을 위한 교육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어렵사리 확보한 좋은 인재를 위기 때 놓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들을 놓치면 다가올 좋은 시기에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할 수 없죠. 많은 경영자들이 직원을 `비용(Cost)`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조업의 시각이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같은 서비스업에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 바로 인재, 사람입니다. 좋은 때는 반드시 옵니다."

◆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반얀트리 서울

= 반얀트리 서울은 옛 타워호텔 용지에 7만㎡ 규모로 들어선다. 호텔 객실은 50여 개에 불과하지만 모든 객실이 특1급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꾸며진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클럽의 회원권은 1억원을 넘지만 문도 열기 전에 이미 2600명이 가입했다. 국내에도 경기 불황의 그늘이 채 걷히지 않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60% 정도의 가입률을 보이고 있다. 보통 호텔 피트니스클럽의 오픈 전 가입률이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이다.

호권핑 회장은 이를 `펜트업 디맨드(Pent-Up Demandㆍ억눌린 수요)`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경기 침체로 회원 모집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반얀트리 같은 `소셜 클럽` 성격의 리조트가 없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과 함께 휴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 커뮤니티를 이루는 것은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하죠. 한국 고객들이 이런 시설을 기다려왔기 때문에 예상보다 가입률이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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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 서울은 반얀트리로서는 이례적으로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이를 `어번 리조트(Urban Resort)`라고 이름 붙였다. 반얀트리는 해변가나 휴양지에 들어서곤 했지만 이 같은 도심형 리조트의 사례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휴양지 리조트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마카오, 상하이, 런던 등에 들어서는 시티 호텔이 많이 늘 겁니다. 이 같은 모델은 이번에 들어서는 서울이 첫 사례입니다. 이번 오픈은 반얀트리 입장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일입니다."

그는 서울에서도 특히 남산의 가능성을 높게 봤다. 세계 어느 도시를 찾아 봐도 서울 남산처럼 도심 한가운데에 자연 생태구역으로 보존돼 있는 산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지만 남산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생태 자원이다. 이 같은 자연환경 속에 리조트가 들어서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남산은 서울이 갖고 있는 세계적인 강점입니다. 남산에서는 사계절을 모두 만날 수 있지만 서울 도심에서 30분 안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교통도 편리합니다. 반얀트리 서울은 천혜의 환경 속에서 세계 최고 리조트로 꾸며질 것이기 때문에 서울시민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세계 곳곳의 반얀트리 마니아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호권핑 회장은 5억명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일생 동안 눈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곧 관광자원이라는 것이다. 또 지방으로 갈 때도 3~4시간이면 방문할 수 있어 이것 역시 장점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제조업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관광산업에 눈을 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잘 활용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반얀트리는 서울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리조트를 개발할 의향이 있습니다. 아직 고려 단계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문화`를 콘텐츠로 한 리조트가 될 것입니다."

■ 존경하는 인물 누구냐? 묻자 주저없이 "혁명가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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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묻자 호권핑 회장은 주저 없이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꼽았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당시 억눌려 있던 남미 대륙의 약자들을 위해 혁명에 나섰던 인물이다. 쿠바에 공산정권을 세운 뒤 공직을 맡았지만 다시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투입됐다가 사살됐다. 폐허였던 푸껫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시켰고, 그 혜택을 지역민들이 고스란히 보게 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의미의 `혁명가`라고도 볼 수 있겠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희는 버는 돈을 대부분 지역사회에 재투자하지요. 요즘 똑똑한 사람들은 너무 자신만을 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환원할 수 있어야 하죠. 월가 금융사 CEO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호권핑 회장은 싱가포르에서 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한국 드라마의 열혈 팬이라고 한다. 특히 `대장금`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계속 시청해 왔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에 대해 묻자 그는 기자에게 "남자들이 보기엔 한국 드라마가 어떠세요?"하고 반문했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말을 이었다.

"한국 드라마는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방송국에서도 한국처럼 드라마를 만들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하고 있죠.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 남성들이 멋있게 묘사되고 거의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아요. 조금 다른 각도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최근 한류 현상은 저희로서도 많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 He is…

△1952년 홍콩 출생 △대만 둥하이대,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기자 △1981년 반얀트리 경영 시작 △2005년 런던비즈니스스쿨 기업인상 수상 △현 반얀트리 홀딩스 회장, 싱가포르미디어 회장, 싱가포르대 총장, 인시아드 국제회의 멤버

[최승진 기자]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글로벌 두산)⑧"독주 원샷하면 계약하겠소"

(글로벌 두산)⑧"독주 원샷하면 계약하겠소" (인터뷰)김동철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中시장 성장세 지속..美·유럽시장도 회복 기대"
"밥캣 시너지 등 '두산인프라'브랜드 글로벌화 노력"
입력 : 2009.10.30 09:39
두산인프라코 17,850 1000.56%
종목 지수 그래프 종목시세목표주가기준일 주가(또는 지수) = 100으로 했을때, 종목주가와 KOSPI(또는 KOSDAQ)지수의 상대지수 그래프 기준일:조회일기준과거70영업일/20분지연
[이데일리 정재웅기자] "여기에 놓인 이 술을 한번에 다 마시면 계약하겠습니다"

박한철 두산인프라코어 시안(西安) 지사장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글래스 잔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독하기로 유명한 중국 백주(白酒)가 가득 차 있었다.

열악한 중국시장을 뚫느라 일년의 절반을 중국에서 구른 탓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그로인해 얻은 신장염으로 매일 한약을 달고 살던 그였다. 계약처의 농반진반 섞인 제의인 줄은 알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을(乙)'의 입장이다. '중국에 우리 굴삭기만 팔 수 있다면..'. 결국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원샷'을 했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외쳤다. "이제 사인 하시죠".

놀란 상대방이 얼른 계약서에 사인을 해 건네줬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후 기억은 없다. 다만 이틀간 숙소에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는 기억밖에는.

김동철 두산인프라코어(042670)(17,850원 100 +0.56%) 부사장은 지난 93년 처음 중국을 처음 개척할 때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에 말 없이 창가쪽만 쳐다봤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 부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참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요".

▲ 김동철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그는 중국시장을 발판으로 세계로 도약하는 두산인프라코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한 마디 속에는 그간의 회한이 묻어있는 듯 했다. 김 부사장은 두산인프라코어의 중국 시장 개척의 산 증인이다. 박 지사장의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의 눈은 자꾸만 과거를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는 "자꾸 옛날 생각나네"를 반복했다.

그는 "박 부장 같은 사람들이 한·중 수교 이후 총 6명이 중국에 파견됐다. 나름대로 중국어 교육도 1년간 받고 간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현지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 부사장은 "무엇보다도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면서 "한국의 자동차는 조금 알고 있지만 굴삭기도 만드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어 참 애를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일본 제품과 캐터필라 같은 제품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충분히 있었다"며 "지역별로 전화번호부를 뒤져 건설회사란 건설회사는 모두 직접 찾아다녔고 밥먹다가 덤프트럭만 지나가도 먹던 밥 팽개치고 쫓아가 세일즈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두산인프라코어는 현재 중국 굴삭기 시장 점유율 16%(2009년 9월 기준)로 중국 건설기계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 15년간 발로 뛴 결과다. 아울러 중국 옌타이 공장을 비롯한 3개의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실로 보따리상으로 시작해 거부(巨富)가 된 셈이다.

김 부사장은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일단 양질의 대리상(代理商) 확보가 중요했다"며 "회사 사장의 마인드도 괜찮고 해당 지역에서 기계장비를 팔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 위주로 엄선해서 뽑았다"고 말했다.

엄선된 대리상을 통한 두산인프라코어의 판매 확대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다. 마침 불어닥친 중국 건설시장의 호황과 고객의 니즈에 맞는 품질과 합리적 가격이라는 두산인프라코어만의 아이템이 상승효과를 낸 것이다.

그는 "당시 회사직원 10여 명을 두고 일년에 20~24대를 판매하던 대리상들이 지금은 약 200여 명의 종업원을 두고 일년에만 약 500대를 판매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강점은 '두산의 성장=대리상의 성장, 두산의 발전=대리상의 발전'이라는 공식이 확고하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건설기계의 특징상 철저한 AS는 필수적인 요소"라며 "현재 두산인프라코어의 AS는 다른 경쟁사들도 놀랄만큼 탁월하다"고 자신했다.

실제로 두산인프라코어는 현재 중국시장에서 'SAN150'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SAN(Service Assuarance Network)150은 반경 150㎞ 이내의 장비는 해당 AS센터가 24시간 이내에 커버토록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줄여 조만간 'SAN100' 전략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김 부사장은 "SAN150 전략의 고객 만족률은 97%에 달한다"며 "향후에는 SAN100전략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시간도 24시간에서 12시간 이내로 줄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국 시장 전망에 대해 그는 "중국 정부가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4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이후 시장 사정은 확실히 나아졌다"면서 "올들어 지난 9월까지는 전년대비 9% 가량 성장한 상태이며 특별한 사안이 없는 한, 내년까지 이런 성장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 "오는 2012년 교체되는 중국정부가 그 이전에 청사진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고 그때쯤이면 중국 뿐만 아니라 지금 침체기를 겪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 시장도 살아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밥캣과 관련해선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중국시장에서 밥캣의 제품을 많이 알려내고 싶다"며 "현재 두산인프라코어가 하고 있는 제품과 세그먼트가 다르지만 상호간 시너지를 통해 중국 시장에 알려지도록 할 것이며 곧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향후 포부에 대해 물었다. 김 부사장은 "현재 중국에서 진행중인 사업이 안정화될 수 있도록 잘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면서 "옌타이 공장과 작년에 완공한 로더 공장, 현재 소주(蘇州)에서 진행중인 소형건설장비 공장이 원활히 되면 중국 수요는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중국에 와서 굴삭기 등 건설기계장비에 대해 물을 때, 중국 어디서나 '두산'을 꼽도록 하는 것이 내 꿈"이라고 말했다.
 
"가능하겠죠?"라고 묻자 그는 그가 주저없이 말했다.  "내가 못하면 내 후배들이 반드시 해낼 겁니다"라고.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조은시스템회장/ 참존 회장 인터뷰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창업한 김승남 조은시스템 회장이 자신의 멘토 김광석 참존 회장과 만났다. 김승남 회장이 김광석 회장에게서 배운 것은 차별화 전략. 김광석 회장은 자신의 이름처럼 차별화는 전광석화처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 이필재 편집위원·사진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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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이 있던 9월 8일은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포브스는 서울 청담동 참존빌딩 회장실에서 대담을 마친 두 사람을 건물 옥상으로 이끌었다.

김승남 회장 제가 사업에 눈을 뜬 건 김 회장님의 청개구리 전략을 벤치마킹하면서부터입니다. 청개구리 전략이 경영 용어로는 차별화 전략 아닙니까? 화장품 회사가 대부분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쓸 때 청개구리 캐릭터를 광고에 등장시킨 것이나 샘플 중심의 영업을 시도한 것도 차별화를 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차별화 전략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김광석 회장 진정한 차별화란 남들과 더불어 있는 가운데 나의 특성이 두드러져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홀로 동떨어져 있음으로써 눈에 띄는 건 진정한 차별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백 명의 사람에게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더니 다들 검은 양복에 검은색 모자를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한가운데 내가 흰 양복에 흰색 모자를 쓰고 서는 겁니다. 그럴 때 아흔아홉 명은 나를 위한 바탕색이 됩니다. 사실 조물주는 모든 인간을 서로 다르게 창조했습니다.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달라요.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불어 사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차별화란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차별화란 남의 것을 흉내내지 않고 나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남 차별화 전략은 블루오션 전략과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영하는 조은시스템이나 제가 창업한 잡코리아도 김 회장님의 차별화 전략을 벤치마킹해 대기업이 주목하지 않던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시장을 공략해 해당 시장에서 업계 1위가 됐죠. 강자가 없는 시장에 화력을 집중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차별화 전략을 쓰신 배경이 무엇입니까?

김광석 화장품 하면 사람들이 색조 화장품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화장품엔 색조 화장품과 기초 화장품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잘하는 건 기초 쪽입니다. 색조 화장품은 잘 못 만들어요. 그래서 내가 강한 기초 쪽에 집중한 것이죠. 25년 동안, 피보약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43년 동안 차별화를 했습니다.

기업을 하는 분들이 이런 과정과 나름의 성과를 지켜보고서 괜찮으니까 벤치마킹을 하겠다고 하는 거죠. 제가 만일 차별화라는 확실한 경영전략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색조 화장품을 만들었을 겁니다. 색조 쪽을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남들이 설악산 간다고 영동고속도로로 몰릴 때 저는 인천 송도 앞바다로 간 셈이죠.

교통량을 감안하면 어느 길이 시간이 덜 걸리겠습니까? 저는 김 회장님도 그런 유의 시도를 했다고 봅니다. 대기업을 따라가지 않고 고유의 자원을 투입해 성공을 거둔 거죠.

김승남 조은시스템은 개항 때부터 인천국제공항의 보안을 맡고 있습니다. 검색, 폭발물 처리 등은 저희 회사가 가장 잘합니다. 주한미군 시설도 모두 저희가 맡고 있고, 금융권 보안시장에서도 업계 1위죠. 공항, 공공기관, 금융권 등 보안 분야 대기업들의 관심이 적은 시장에서 차별화를 하고 마케팅도 차별화한 결과입니다.

구체적으로 맞춤 서비스, 역량의 집중, 교육 훈련 등에서 차별화를 했습니다. 잡코리아도 처음엔 포털, 커뮤니티, 구인·구직 사이트를 다 하다가 나중에 구인·구직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양쪽 다 1000억원대의 회사로 성장했고, 잡코리아 지분을 몬스터닷컴에 넘긴 후 거기서 들어온 돈으로 조은시스템에 투자하고 조은문화재단도 만들었죠.

지금은 사랑받는 보안 기업이 되기 위해 보안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강점을 지닌 고유한 영역을 고수하는 것도 차별화라고 봅니다. 참존이 시장에서 강한 기초 화장품에 주력하는 것이야말로 차별화죠.

김광석 저는 경영인이기 전에 기술인입니다. 이 점이 저의 강점이고 차별화의 포인트죠. 참존화장품을 설립한 건 제가 43년 전 피보약국을 개업해 약을 조제하면서 쌓은 피부약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강점을 바탕으로 한 차별화라고 할 수 있죠. 약점은 제쳐두고 강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피부약 전문 약사가 된 건 첫째로 당시 잘 듣는 피부약이 없었고, 둘째로 피부병 약의 약효는 약사는 물론이고 환자들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강점을 바탕으로 했지만 처음부터 강점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참존화장품 자체의 강점은 사용하면 피부가 희어지고 탄력 있고 촉촉해진다는 겁니다.

흰 피부는 동양권 여성들의 간절한 소망이죠. 기초 화장품은 주식에, 색조 화장품은 부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식으로 대개 밥이나 빵을 먹듯이 기초 화장품은 거의 세계 공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남 하동 출신인 김광석 회장은 부산공고를 거쳐 1966년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했다. 그는 서울 중구 스카라극장 앞 골목 안에 피보약국을 차렸다. 약국 수입이 괜찮았던 시절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잘 안 됐다. 그래서 피부병에 잘 듣는 약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이 약이 대박났다. 30대 중반에 중구 도시새마을연수원을 만들어 연수원장을 지낼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 피보약국이 유명세를 타자 대구·부산 등 전국의 약국 60곳에서 약을 달라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 매출액으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주문이 쇄도했다.

하지만 이 일로 그는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렸다. 무허가 제약을 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이 안 돼 있던 그 시절 약을 조제해 내 약국에서 파는 건 괜찮았지만 남의 약국에서 그 약을 팔면 범법 행위였다. 그는 잘나가던 약사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7개월째 도피생활을 하던 중 양산 통도사에 숨어들었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골방 구석에 6개월 전 신문이 놓여 있었다. 거기 그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불혹의 도망자. 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길로 그는 서울지검을 찾아가 자수했고 항소심에서 8억3000여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김 회장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족히 백 배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벌금을 벌기 위해 그는 참존화장품을 설립했다. 새옹지마. “그 시절 그렇게 좌절하지 않았다면 참존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어느 약사가 조제약을 다른 약국에서 사갑니까? 저 같은 사람이 없다 보니 관련법도 없고, 판례도 없었죠. 그래서 참존을 세우고 창업이념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이미 내 안엔 성공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뒤에 걸린 창업이념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참존은 부유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창업한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으며 다시 묻혀야 할 나의 조국을 풍요롭게 하며, 세계 속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는 것, 이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사명이다. (중략) 참존이 있어 세계 여성이 아름다우며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품질 개선에 정성을 다할 것이다.(후략)’


김승남 참존 하면 많은 사람이 광고에 나온 청개구리 캐릭터를 떠올릴 겁니다. 요즘은 광고를 많이 안 하시죠? 이 역시 의도된 차별화인가요?

김광석 남들이 광고 많이 한다고 해서 따라 하면 차별화가 아니죠. 그렇다고 제품 소개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3S 전략입니다. 3S는 샘플, 세미나, 서비스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죠. 우선 샘플 전략은 품질이 좋아야 먹힙니다. 고객들이 참존의 샘플을 써보고 좋으니까 제품을 사는 거죠.

저희 샘플이 인기가 있으니까 소매점에서 다른 제품을 팔면서도 샘플은 저희 것을 줍니다. 심지어 저희 샘플만 모아서 판매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이 전략은 품질이 떨어지면 이중의 타격을 입습니다. 샘플을 제공하느라 비용 들어 타격 입고 기껏 샘플을 뿌리고도 제품이 안 팔려 타격을 입는 거죠.

품질이 떨어지는 회사는 샘플을 줘도 소비자들이 안 받아 갑니다. 세미나는 원주공장에서 창업주인 제가 매번 직접 합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벌고 MBC 성공시대에도 출연한 사람이 저렇게 안 해도 될 텐데…” 하면서도 경청을 합니다. 그 동안 다녀간 VIP 여성만 12만 명가량 돼요.

한 번 다녀가면 참존의 마니아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참존을 홍보합니다. 세 번째 전략인 서비스의 핵심은 CCS(참존 커스터머 숍) 전략입니다. 참존과 소비자가 1대1로 직거래하는 상점이죠. 참존 쇼핑몰(080-8383-000)로 전화하면 택배 비용을 포함해 시중가격의 절반에 제품을 보내줍니다.

유통마진을 고객에게 돌려주는 것이죠. 단 CCS 브랜드가 따로 있어요. 브랜드만 다를 뿐 내용물은 꼭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참존은 대리점·소매점에 유통을 의존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청개구리 캐릭터와 차별화

김승남 우리 기업들이 불황의 터널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차별화 전략은 이런 불황기일수록 더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봅니다. 이런 시절엔 여느 때와 발상법과 비전도 달라야죠.

김광석 유용한 정도가 아니라 필수 전략이죠. 불황기엔 경쟁이 더 치열해 일등만 살아남습니다. 한마디로 나 말고는 모두 적인 시절입니다. 그러니 경쟁에서 이길 특별한 요소가 내 안에 있는지 잘 따져봐야죠.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기존의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황기엔 뭔가 새로운 것, 특별한 것을 찾아내 거기에 내부 역량을 집중하는 차별화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모든 전략과 전술이 상식에서 나옵니다. 경쟁에서 도태될 것 같은 기업은 나름대로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본다는 자세로 차별화해야 합니다.

저는 인생살이나 기업 활동이 동굴 탐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컴컴한 동굴 안에서 돌출부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낮은 포복 자세로 끊임없이 탐사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간다고 다른 기업의 뒤꽁무니만 붙잡고 있어서는 비전조차 세울 수 없죠. 차별화는 타이밍과 스피드도 중요합니다. 적기에 전광석화처럼 해야 시장을 선점당하지 않습니다.

김승남 타이밍과 스피드를 최적화하지 않으면 사실 차별화 자체를 하기가 어렵죠. 네이버나 구글 같은 검색엔진이 성공한 것도 타이밍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제품·서비스의 차별화도 필요하지만 고도의 차별화는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하고 저마다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로는 성공을 못했지만 MP3플레이어 아이팟을 내놓음으로써 애플을 실력 있는 회사로 만들죠. 차별화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차별화 전략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했으면 합니다.

김승남 회장은 사업을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직업군인 출신이다.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나온 김 회장은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1963년 임관해 21년간 복무했다. 진급에서 두 번 누락된 후 전역해 충북은행 안전관리실장으로 금융권에 발을 들여놓지만 “군바리는 물러가라”는 노조의 반발에 부닥쳐 BYC생명으로 자리를 옮긴다.

열정적인 마케팅으로 발군의 영업실적을 올려 저축본부장에 발탁됐지만 의욕이 너무 앞서 직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었다. 보험회사에서는 임원 자리를 마다하고 전표 쓰는 법부터 배웠다. 법인영업부장을 거쳐 상무로 승진한 그는 1993년 쉰둘의 나이에 1000만원으로 조은시스템을 창업한다.

김광석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들이 많이 가는 안정된 길을 가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위험이 따르지만 남다른 방식으로 사는 겁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남보다 앞서가려면 위험 부담을 안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 가운데 안정된 길만 간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인생의 골짜기까지 내려갔었고 가다 보니 오르막길로 바뀌고 봉우리가 나타나더군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길에 매진하면 하늘도 돕습니다.

김승남 저는 손길승 SKT 명예회장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은행이나 대기업을 선망하던 시절에 이분은 ‘작은 기업에 들어가 큰 기업으로 만들어 보라’는 지도교수의 권유에 따라 선경직물에 입사했고, 결국 이 회사를 SK라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죠.

저는 젊은 세대에게 큰 기업에 들어간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게 아니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중소기업에 들어가 미친 듯이 일해 대기업으로 키우는 것도 인생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어요.

김광석 기업이든 개인이든 자신의 최대 강점을 찾아내는 게 차별화의 시작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차별화라고 할 수 있죠. 차별화는 또 장수 기업으로 가는 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적기에 발 빠르게 차별화하면 기업이 노쇠해지지 않습니다. 차별화는 전 단계에 있는 모든 기업이 상시적으로 추구해야 할 전략입니다.

김광석 회장이 말하는 차별화 전략

▶ 자신의 강점을 찾아내라

자신의 강점을 찾아내 이를 바탕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라. 약점은 제쳐두고 강점에 선택과 집중하라. 두드러진 강점이 없으면 시장에서 기회 요인을 찾아내 강점을 만들어내라. 내가 피부과 전문 약사가 된 것은 당시 시장에 잘 듣는 피부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 타이밍과 스피드가 중요하다

차별화에도 적기가 있다. 조금 늦어도 안 되고 조금 일러도 실패할 수 있다. 또 차별화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전광석화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을 선점당하지 않는다.

▶ 차별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라

고유의 강점을 찾아냈으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CEO가 바뀌어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시장조사 결과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차별화한 고유성을 잃지 않는 것도 차별화다.

▶ 상시적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라

꾸준히 차별화하면 기업의 노화를 차단할 수 있다. 탄생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 어느 단계에 있든 상시적으로 차별화한다면 기업도 늙지 않을 수 있다. 차별화란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이다.

늦깎이 창업자끼리 잘 통한다?
김광석 참존 회장과 김승남 조은시스템 회장은 1994년 서강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8기)에서 만났다. 당시 김광석 회장은 창업 10년차였고, 김승남 회장은 막 창업했을 때였다. 김승남 회장은 김광석 회장에 대해 “내가 사업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멘토였다”고 말했다.

“당시 참존은 중견회사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뒤늦게 화장품 업계에 진출하셨지만 청개구리 전략으로 기초 화장품 분야에서 돌풍을 일으키셨죠. 이런 모습을 보면서 틈새시장을 찾아 질 좋은 서비스로 승부하면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믿게 됐습니다. 당시 김 회장님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선두업체를 그대로 모방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선두업체와 경쟁하지 않는 방향에서 접근하는 청개구리 전략을 써야 성장의 길에 들어설 수 있죠.’”

두 사람은 늦깎이로 창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광석 회장이 45세에, 김승남 회장은 52세에 회사를 일궜다. 김광석 회장은 피부약 전문인 잘나가는 약사에서 하루아침에 무허가 제약 혐의자로 전락한 신세였다. 김승남 회장은 21년간의 직업군인 생활을 마감하고 금융권을 거쳐 창업했다.

김승남 회장은 “바쁜 분에게 떼쓰듯이 만나자고 청해 지도받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님은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깊은 분입니다. 이런 점을 배운 것도 보람이었죠.”

그는 김광석 회장의 조언에 따라 보안업계 최강자인 세콤(에스원)이 취약한 공항, 금융권, 공공기관 쪽에 역량을 집중했다. 보안시장을 나름대로 세분한 뒤 강자가 약한 시장에서 차별화를 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광석 회장이 “저는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은 안 갔는데 이 점을 김승남 회장이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거들었다.

멘토인 김광석 회장이 올해 고희, 멘티인 김승남 회장도 고희를 바라보는 예순여덟이다. 김광석 회장과 김승남 회장이 차별화 전략의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데 노익장이 따로 없었다.



포브스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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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빅4’ 도전장 낸 윤윤수 휠라그룹 회장

‘글로벌 빅4’ 도전장 낸 윤윤수 휠라그룹 회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윤윤수 휠라그룹 회장은 “시장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며 “2014년까지 30억 달러 매출을 올려 세계 4위 스포츠 브랜드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14일 서울 강남의 오크우드호텔. 스포츠 브랜드인 휠라의 글로벌 콘퍼런스 미팅이 한창이다. 미국·중국·영국·브라질 등 20여 나라에서 온 이 회사 지역·국가 책임자들이 브랜드 포지셔닝, 마케팅, 제품 조달 전략 등을 놓고 머리를 맞댄 것. 바로 전날 휠라는 ‘5년 내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세계 4위 스포츠 브랜드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휠라의 글로벌 콘퍼런스가 한국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윤수(64) 휠라그룹 회장은 “미국에서 열리던 관례를 깸으로써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번 행사는 세계에서 모인 40여 명의 휠라 책임자가 으쌰으쌰 잘해보자고 다짐하는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존 엡스타인 휠라USA 사장은 “20년 가까이 놀라운 실적을 보여준 진윤(Gene Yoon·윤 회장의 영문 이름)을 배우러 왔다”며 크게 웃었다. 휠라코리아의 화려한 성적표가 세계 각국 휠라 책임자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글로벌 콘퍼런스 행사 현장에서 윤 회장을 만나 글로벌 경영 전략을 들어봤다.

-이번 콘퍼런스의 주요 이슈는.
“휠라는 191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브랜드다. 앞으로 2년 뒤면 탄생 100주년인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공유하는 게 필요했다. ”

-5년 내 30억 달러 매출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는데 실현 가능한 것인가.
“무엇보다 올해 매출 전망치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올해 휠라그룹 매출은 12억 달러로 지난해(11억 달러)보다 9%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감안하면 꽤 선방한 셈이다. 현재 환율(달러당 1170원)이라면 최대 3000만 달러 가까운 순이익이 날 것으로 기대된다. 휠라코리아도 계속 순항하고 있다. 올해 3300억원대 매출을 올려 지난해보다 13%가량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휠라는 스포츠 브랜드 중에서 세계 6~7위쯤 한다.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하면 충분히 세계 4위권으로 점프할 수 있다. 부실은 거의 다 털어냈다. 돈을 잃을 요소가 없으니 이제 돈 벌 일만 남았다.”

-글로벌 빅4를 이뤄낼 키는 무엇인가.
“먼저 공급망을 바꿨다. 좋은 거래선을 많이 발굴했다. 예를 들어 11달러 하던 신발 납품 평균 단가를 8~9달러로 낮췄다. 물류 혁신도 이뤄냈다. 우리 창고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고객에게 전달되는 물량이 전체의 80%에 이른다. 그만큼 효율이 좋아졌다. 물류구조 혁신을 통해 마진이 8% 이상 개선됐다. 특정 분야에서 성가를 올리고 있는 기업들과의 협업도 강화했다. 최근 일본의 혼다 레이싱팀과 제휴해 모터스포츠 관련 제품들을 내놓았다. 미국의 타이어 업체인 파이어스톤과도 손을 잡았다. 앞으로 매출 증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협업 성공 사례를 좀 더 설명해 달라.
“미국 백화점 체인인 코올스(Kohl’s)와의 협력을 예로 들겠다. 코올스 매장 300여 곳에 지난해 초부터 ‘휠라 스포츠’ 브랜드로 의류와 신발을 독점 공급했는데 이제까지 의류에서 1억 달러, 신발에서 1500만 달러의 누적 매출을 올렸다. 올해 휠라USA의 매출 2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을 코올스 매출이 차지하게 된다.”

-나이키·아디다스를 비롯해 푸마·스케처스·스니커즈·아식스 등 강자와 경쟁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한마디만 하자. 경쟁자는 강하고 크다. 그러나 시장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주눅들 이유가 없다.”

91년 휠라코리아 대표로 휠라와 인연을 맺은 윤 회장은 빼어난 영업 실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봉급쟁이’ 반열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외환위기 때 펴낸 '내가 연봉 18억을 받는 이유'라는 책은 수십만 권이 팔렸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2007년 1월 윤 회장과 휠라코리아가 주축이 돼 미국계 사모펀드 서버러스에 3억5000만 달러를 주고 휠라그룹을 통째 사들인 것. 기껏해야 영업이나 잘하는 줄 알았던 한국 법인이 ‘몸통’을 삼켰다고 해서 크게 화제가 됐다.

-휠라그룹을 인수한 후 한동안 조용했다.
“회사에 문제가 많았다. 예상보다 그룹 부실이 커서 실망도 많이 했다. (웃으면서) 그러나 이미 돈을 냈으니 되돌릴 수 없는 것 아닌가. 내부 부실을 털어내는 데 3년 가까이 걸렸다. 이제는 거의 해결했다.”

-무엇이 그렇게 골칫거리였나.
“미국 시장이 문제였다. 서버러스가 경영하면서 너무 공격적으로 출점을 했다. 한 해에 20개가량 신규 점포를 열었는데 여기서 만족스러운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수익이 나기는커녕 점포당 연평균 200만 달러씩 손해를 봤다. 인수 첫해에만 약 6500만 달러 적자가 났다. 지난 3년 가까운 세월 중 절반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비즈니스를 고민하느라 전체 업무 시간의 3분의 2는 썼을 것이다. 항공사 마일리지만 38만 마일을 쌓았다. 환산해 보니 지구를 15바퀴 넘게 돈 셈이다. 정말이지 죽기 살기로 일했다. 휠라USA는 올해 1500만 달러쯤 흑자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

윤 회장 명함에는 ‘GLBH홀딩스 회장’과 ‘휠라코리아 회장’이란 두 개의 직위가 적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휠라글로벌의 지주회사인 GLBH홀딩스와 휠라코리아 회장을 겸임한다. GLBH홀딩스는 서버러스에서 인수한 회사로, 이 회사의 대주주가 휠라코리아다. 휠라그룹 전체를 휠라코리아가 소유하고 있는 구조다. 윤 회장은 휠라코리아와 미국 법인만 직접 경영한다. 나머지 국가엔 라이선스 계약이나 합작회사 설립 등의 형태로 진출했다. 유럽·중동·아프리카에선 인테그릭스(Integrix), 남미에선 다스(DASS), 일본에선 이토추상사와 손을 잡고 휠라 제품을 팔고 있다. 윤 회장은 “이들 회사와 장기 계약을 해 받은 라이선스 수익금으로 서버러스 인수대금을 지급했다. 이들 회사와 휠라는 공동 운명체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사업은 더딘 것 같다.
“중국에선 중저가 브랜드 안타(ANTA) 스포츠와 합작 법인을 설립했다. 정스중(鄭世忠·39) 회장이 경영하는 안타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주목 받는 회사다. 브랜드가 약해 고민하던 중 마침 우리와 계약하게 됐다. 조건도 좋다. 합작 회사를 만들 때 계약금 5000만 달러와 주식 15%를 받았고, 3%의 판매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 판매 전략이 아주 공격적이어서 내년에만 중국 전역에 300개 매장을 새로 열겠다고 한다.”

-다른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면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지 않나.
“휠라가 진출한 국가가 70개쯤 된다. 각각 역사와 문화, 기후, 유행이 다르다. 신체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인기 있는 아이템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공통분모를 최소화하는 디센트럴라이제이션(탈집중화) 전략을 쓰고 있다. 15~20% 정도만 통일성 있는 상품을 내놓고 나머지는 각국 시장 상황에 맞는 제품을 구비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선 러닝화를, 이탈리아에서는 럭셔리 제품군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한 곳에서 히트한 디자인을 공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컬렉션을 전 세계에 판다는 것은 큰 자금이 들어간다. 우리에게 이런 여력은 없다. 이것은 나이키도 마찬가지다. 자칫하면 엄청난 재고 부담을 질 수도 있다. 한편으론 브랜드 통일성을 위해서 ‘브랜드 북’을 만드는 등 자체적인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

-회사를 상장할 계획은.
“2007년 휠라그룹을 인수할 당시 투자금을 제공한 삼성증권·미래에셋·군인공제회 등과 내년까지 상장하기로 계약했다. 내년 하반기께 상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 최고액 봉급쟁이로 유명했다.
“일은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열심히 하다 보면 돈은 어느새 주머니에 들어와 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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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여러분 손석희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손석희입니다

<100분토론>을 사랑해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손석희입니다.

제가 <100분토론>을 두 번 진행한 후인 지난 2002년 1월 26일에 이 게시판에 처음으로 인사차 글을 올린 후 7년 10개월 만에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제 거취문제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열흘 가까이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걱정도 해주셨고 격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진심으로 저를 아껴주시는 차원에서 조언도 많이 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퇴진 문제와 관련해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상황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회사측도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보도된 것처럼 제 문제는 노사관계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제가 입장을 좀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회사측의 결정에 따른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퇴진이 결정된다는 전제하에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은 마지막 인사차 올리는 글입니다. 이미 저의 퇴진 문제가 공론화된 마당에 모두에게 부담만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혹 제가 <100분토론>에 남게 되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질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그대로만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정치적 배경도 없으며, 행간의 의미를 찾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7년 10개월 전에 제가 이 게시판에 올린 첫 글에 "저는 어떠한 정치적 당파성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저는 지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100분토론>을 진행하면서 이 약속을 크게 어긴 적은 없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부에선 저의 퇴진 문제를 논하면서, 편향된 면은 있었지만 퇴진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걸 봤습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자칫 이것은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랬다면 <100분토론>이 오늘날 대표적 토론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토론진행자로서 허물이 없을 순 없겠지만 8년을 진행하고 물러나면서 가질 수 있는 이 정도의 자부심은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저의 퇴진문제가 프로그램의 새로운 출발과 연관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의 퇴진문제로 더 이상의 논란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실 지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주일에 하루씩은 거의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이제는 밤샘에서 해방됩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했던 회의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남는 시간은 학업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좀 더 매진하는 데에 쓰겠습니다. 그 동안 새벽 두시가 돼서야 끝나는 프로그램을 시청해주시느라 함께 고생하신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동시에 저나 <100분토론>을 아프게 비판해주신 분들께도 특별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한 비판 덕분에 또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개편때까지 이제 저의 진행은 네 번 정도 남았습니다. 11월 26일부터는 새로운 진행자와 함께 한 단계 더 도약하는 <100분토론>을 저도 시청자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세계를 누비는 금융전략가 J.P.모건 부사장 김수진

세계를 누비는 금융전략가 J.P.모건 부사장 김수진
예일대 정치학, 컬럼비아대 MBA출신 M&A전문가 / 김두호
작성일 : 2009-08-24
 



[인터뷰365 김두호] 미국의 종합금융투자은행 J.P.모건의 런던법인 부사장으로 활동하는 재미동포 크리스티나 수진 김(한국명 김수진 33) 씨에게는 할 일은 많고 세계는 좁다. 파라과이 이민동포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뒤 브라질과 홍콩에서 금융투자분야 사업 활동을 했고 지금은 영국 런던에서 근무하고 있다.


뉴욕에 본사가 있는 J.P.모건은 1838년에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인 금융투자기업이다. 창립자인 미국의 사업가 조지 피바디가 런던에 개점한 상업은행이 기초가 된 유래가 있어서 런던지사는 모건 직원들이 긍지를 느끼게 하는 근무처다.  ‘2009 세계 한인 차세대대회’ 참석 등 모국 방문의 짧은 일정 속에서 <인터뷰365>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 준 그녀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느낀 인상은 국경과 인종의 벽을 깨트리고 세계를 무대로 마구 날아다니는 언더우먼 같았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인생을 멋있게 살고 싶다.’는 것이 크리스티나 수진 김의 꿈이고 인생관이다. 파라과이에서 미국으로, 그녀의 가족은 한국을 떠난 후 두 차례나 이주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고 밝게,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시원시원하고 속이 툭 트인 사람을 두고 화끈하다는 말을 한다. 당신의 첫 느낌이 그런 사람 같다.

하하하. 좋게 보았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겠다. 인터뷰 사진은 아주 예쁘게 나온 것을 실어주기 바란다.


대개 이주한 동포들은 영문 이름에 한국 성명을 약자로 넣지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크리스티나 수진 김’(Cristina Soo Jin Kim)은 누가 지은 이름인가?

아버지가 작명했다. 나는 1976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의 고향은 한국이지만 나의 고향은 파라과이인 셈이다.


가족은 언제 이민을 가셨는가?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73년이다. 서울에서 건축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김태웅 69)는 어머니(김미자 64), 나에게 조부모님이신 부모님까지 모시고 모두 함께 파라과이로 가셨다. 그곳에서 양계농장을 경영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4살 많은 언니가 한사람 있다.


남미의 파라과이라면 정말 먼 나라다. 언제까지 그곳에서 살았는가?

내가 14살 되던 해까지 살았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올 무렵 남미로 개척이민을 오신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순시온에도 외롭지 않을 만큼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성당이나 학교에서 동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양계장을 하시기 전에는 점포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미국으로 다시 이주를 하게 된 동기는?

우리 자매의 교육문제를 염두에 두고 결정하셨다. 1990년 미국 뉴욕의 퀸스로 이주해 아버지는 블루클린에서 스포츠화 점포를 운영하셨다. 나는 중학교 과정인 8학년에 입학해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이어서 과학고인 블롱스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예일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금융비즈니스 쪽으로 진로를 바꾼 건가?

많은 생각을 했다.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미국에서 해볼 만한 가장 화려한 직업인은 금융 전문가라는 판단을 했다. 2004년에 컬럼비아대학원 MBA를 다닌 것도 나의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됐다.


그 후 줄곧 J.P.Morgan에서 근무했는가?

아니다. 첫 일자리는 한국에서도 투자활동을 해 잘 알려진 메릴린치 뉴욕지사였다. 나는 그곳에서 남미국가와 아시아 유럽지역의 투자컨설팅에 참여했다. 기업의 인수 합병문제(M &A)도 내 전문분야였다. 나는 스페인어권에서 자라 다른 사람보다 스페인어를 잘한다. 그로인해 브라질지사로 파견근무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상파울루에서 2년6개월간 근무하며 브라질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등 남미국가의 투자 프로젝트에 관여했다.


줄곧 혼자서 생활했는가?

그럼 미혼인데 누구랑 사나? 그곳에 있는 동안 별도로 숙소를 마련하지 않고 호텔에서 살았다. 혼자 생활할 때는 아파트나 주택보다 호텔이 편리하다.


엄청난 생활비가 들지 않는가? 도대체 연봉이 얼마인가?

쓰고 남을 만큼 받는다. 하하하. 지금 영국에서는 주택을 마련해 지내고 있다.


브라질에서 다시 어디로 간 것인가?

3년 가까이 머물자 남미(남아메리카)를 떠나고 싶었다. 회사나 주변사람들에게 ‘크리스티나 하면 남미통’이라는 인식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컬럼비아대학원 MBA를 할 때 세계적인 화장품메이커 에스티로더 CEO의 리더십특강에서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 국제 금융분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이 기회의 땅이라는 지적이었다. 나는 우선 자신감에 생겼다. 아시아 인종이므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이 아시아라는 것 때문이었다. 결심이 서자 내 전문분야의 인력이 부족한 J.P.Morgan으로 근무지를 옮겨가며 아시아 파견을 지망했다. 처음에는 상하이나 베이징으로 생각했다가 생활과 활동에 다양성이 많은 홍콩으로 바꾸었다.


꿈을 꿈으로 돌리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놀랍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싶은 일은 그냥 앉아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홍콩의 2년6개월은 참으로 힘들고 한편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일벌레가 됐다. 서울과 싱가포르 중국을 오가면서 새벽까지 전화를 걸었고 휴일도 없는 일과가 반복됐다. 그럴수록 나의 에너지는 폭발한다. 일에 중독이 된 시간이 행복하니까.


홍콩에서는 얼마나 살았나?

그곳에서도 2년6개월이었다. 아마도 그 기간이 내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게 하는 주기성 기간인지 모르겠다. 그쯤에서 지루함이 느껴지고 다시 새로운 나라와 도시가 그리워지니까. 그래서 유럽을 그리워했고 생각대로 런던으로 가게 된 것이다.


혼자서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일하고 사는 것이 이젠 익숙해졌겠다.

가방 몇 개에 짐을 챙겨 여행을 떠나듯이 홀가분하게 떠난다. 미지의 나라와 도시를 향해 새로운 기대감을 가지고 떠나지만 낯선 사람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다소 두려움도 따른다. 그러나 내가 가는 곳에는 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스스로의 성격 덕분이 아닌가?

부모님에게 배운 정신이 인생을 멋있게 사는 것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배우고 하고 싶은 일도 여자라고 위축되지 말고 무엇이든 이루어가며 즐겁고 멋지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가 딸들에게 일러준 지침이다. 한국을 떠나 파라과이의 거친 땅을 개척하고 다시 딸의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님이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신 분들이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성장기간 부러움 없이 공부를 한 것처럼 보인다.

틀린 느낌은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 동포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을 하는 편인데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비 걱정을 한 적이 없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며 느낀 사회 특성이나 경험담을 듣고 싶다.

국가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인간의 감정은 어디서나 서로 통하고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사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파라과이나 브라질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심성이 착하고 돈이 없어도 낙천적이고 즐기며 사는 기분파가 많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 같은 곳에서 살아도 노래가 흘러나오고 춤을 추며 인생을 엔조이할 줄 안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국가다. 목표를 정해 달리면 원대한 꿈을 성취할 수 있도록 보장이 된 나라로 틀이 잡혀 있다. 사업가가 되던 정치가가 되던.

홍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즈니스 문화를 꽃피운 곳처럼 느껴졌다. 다른 아시안 국가와 달리 예의와 격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과거 영국의 보수적인 전통문화가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다.

런던은 유럽의 중심도시답게 각국의 비즈니스맨들이 모여들어 영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가 엉켜 돌아간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수준도 가치를 느끼게 한다. 생활자체가 문화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식생활도 멋과 격조를 중요시 하는 곳이다.


부사장이라면 어떤 일을 하는가?

내 직책은 J.P.Morgan의 런던법인체에서 투자은행전략그룹 부사장이다. 투자 전략과 관련된 내 전문 분야의 일을 맡고 있다.


결혼은?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 동안 그쪽으로 눈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일생을 함께할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부부는 함께 살며 삶을 공유하는 것인데 멋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



크리스티나 수진 김은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났던 개척 이민동포의 정신을 물려받은 담대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한국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파라과이 출생의 이민 2세대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한국어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구사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게 만드는 정돈된 화술과 친근감을 주는 표정은 고급 비즈니스 세계에서 체득한 인품처럼 보였다. 33살 처녀 크리스티나 수진 김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지만 7백만을 넘어선 우리나라 해외 동포사회에서 자랑스러운 꿈나무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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