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2탄> 벽산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2탄> 벽산그룹
2004년 4월 김 창업주 벽산그룹 ‘재기의 꿈’ 이뤄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2002년 워크아웃 졸업후 채권단이 대주주로 있던 벽산건설이 최근 창업주인 고 김인득 회장의 장남 김희철 회장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보유중인 벽산건설 지분 68% 중 51%(1천9백30만주)를 주당 5천6백50~5천7백원에 옛 사주인 김희철 회장에게 지난 4월2일 매각했다. 부실 기업이 정상화 작업에 성공해 옛 사주가 회사를 되찾은 셈이다.
이번 경영권 획득을 위해 벽산건설의 계열사인 주식회사 인희가,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던 자사 보통주 1천9백32만6천여주를 공개입찰로 매입했다. 이번 주식 양수도는 지난 98년 벽산건설 기업 개선작업 협약 체결 당시 기존 대주주가 경영정상화를 이루면, 대주주에게 주식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기로 한 약정에 따른 것이다. 부실기업이었던 벽산건설의 경영권이 워크아웃 5년만에 옛 사주에게 재매각된 셈이다.

동양물산, 한국스레트공업이 벽산그룹 전신

김인득 벽산그룹 창업주(작고)는 지난 1991년 9월28일 벽산그룹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신임회장 취임식을 맞았다. 그는 ‘남 이상 되기 위해 남과 같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8개 계열사 7천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벽산그룹의 총수가 됐다.
김 창업주는 세 아들을 정·재계 저명인사 가문과 백년가약을 맺게 해 정관계 상류층 혼맥의 중심부에 합류했다. 김 창업주는 1915년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김상수씨와 모친 박차련씨 사이의 4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3수 끝에 명문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마산상업고등학교시절 공부 잘하고 주산과 운동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김 창업주는 학교 졸업후 마산금융조합 직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입사 당시 그의 월급은 21원. 그는 이곳에서 9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8천9백원이나 되는 거금을 저축했다. 이후 그는 모은 돈으로 피난시절인 1951년 부산에서 동양물산을 설립해 외국 영화를 수입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벽산그룹의 출발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후 그는 곧 서울로 올라와 단성사·반도극장(현 피카디리 극장)·중앙극장 등 큰 극장을 차례로 손에 넣어 전국적인 극장체인망을 구축했다.
1950년대에는 극장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오락시설이 없던 터라 그는 돈방석 위에 앉게 됐고, 1950년대 말에는 흥행업의 왕좌에 올랐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김 창업주는 흥행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제조업에 관심을 돌렸다. 그가 1962년 인수한 한국스레트공업은 지금의 (주)벽산의 전신으로 벽산그룹이 건자재 중심의 그룹으로 성장하는 모체가 됐다.
김 창업주가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 옮아가던 시기는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때 ‘안방극장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당시 돈자루를 안겨주던 극장들을 과감하게 처분했다. 그가 첫 제조업종으로 선택한 슬레이트는 당시 쉽게 부서진다고 ‘비스킷’이라 불릴 정도로 질이 형편없어 슬레이트 업체들은 수요부족으로 도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망성이 없어 보이던 슬레이트 산업도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어촌 지붕개량 사업이 펼쳐지면서 호황을 맞았다. 김 창업주는 슬레이트 생산을 토대로 건자재 중심의 사업에 매진, 벽산그룹을 일궈냈다.

기독교 바탕 … 세 아들 모두 정재계 고위층과 백년가약

김 창업주는 마산상업학교 재학시절 지주 윤두박씨의 딸 현의씨와 결혼해 장남 희철(67), 장녀 숙희(64), 차남 희용(62), 3남 희근(58), 차녀 연숙(55)의 3남2녀를 두었다. 아내 윤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이에 따라 김 창업주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됐다. 특히 장남인 희철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홀몸으로 미국에 유학가면서 김 창업주의 신앙심도 깊어갔다. 김 창업주는 1982년 부인과 사별하고 4년간 혼자 지내다가 1986년 주위의 권유에 의해 전에 자신의 비서였던 박윤자씨와 재혼했다.
김 창업주는 세 아들 희철, 희용, 희근씨를 모두 정재계 고위층 가문에 장가들였다. 두 딸 숙희씨와 연숙씨도 각각 한의사 집안과 치과의사 집안에 시집보냈다.
1966년 장남 희철씨는 전 삼양통산 허정구 명예회장의 딸인 허영자씨와 화촉을 밝혔다. 영자씨(작고)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재원이었다. 김 창업주는 허정구 가문과의 혼사를 통해 럭키금성(현 LG그룹)을 비롯, 현대·삼성 등 대재벌 창업주 가문과 혼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던 1972년, 박 대통령의 형 박상희 가문에서 둘째 며느리를 맞아 권력의 최상층부까지 혼맥을 이어놓았다. 둘째며느리, 즉 희용씨의 부인 박설자씨(59)는 박대통령의 질녀이자 현 자민련 대표의원 김종필씨의 처제다. 이에 따라 희용씨와 김종필씨는 동서지간이다.
김 창업주의 셋째 며느리는 이소형씨(56)로 당시 메트로호텔 이건형 사장(현 전 메트로호텔 대표이사)의 누이동생이다. 이 혼맥은 우성식품·삼환기업·샘표식품 등과 연결된다.
김 창업주의 큰딸 숙희씨는 대구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던 정규만씨 가문에 출가했다. 둘째딸 연숙씨는 치과의사 원희목씨의 둘째 며느리가 됐다. 연숙씨의 남편 원영종(57)씨는 무역업체인 천마교역 사장이다. 둘째 사위 원영종씨는 결혼후 벽산그룹 계열사인 인희산업(현 (주)인희)의 전무까지

승진한 뒤 독립해 지금은 계측기 업체인 화인계기 대표이사 사장이다.
정재계 저명인사들과 이리저리 연결되는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동생 김인동 가문에 의해 더욱 보강된다. 인동(77)씨는 박 대통령 비서실 실장을 지낸 김계원씨와 친동서간이고, 전 서울신문 사장 김종규씨와는 사돈간이다. 인동씨는 외동딸 은숙씨(47)을 김종규씨의 며느리로 시집보냈다. 인동씨는 장녀 은숙씨(47), 장남 희준(46), 차남 희태(44)씨의 2남1녀를 두었고 이들의 혼사를 통해 김봉제 한국트랜스 대표이사 사장과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정계 혼맥 때문에 ‘곤혼스럽기도’

벽산그룹과 김 창업주는 정계 핵심부와 연결되는 혼맥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지만 곤욕을 치른적도 많았다. 벽산이 농어촌 지붕개발사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나, 제일제당을 뿌리치고 국영기업인 대한종합식품을 인수했던 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씨가 권력의 정상에 있던 1970년대 상반기에 있었던 일이다. 벽산그룹은 김종필씨가 설립한 운정장학재단을 맡아 관리하기도 했다.
때문에 벽산그룹은 ‘권력의 비호 속에 급성장하고 있다’거나 ‘김종필씨의 정치자금줄’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정변이 발생할 때, 특히 김종필씨가 수세에 몰릴 때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벽산그룹은 10·26 이후에만 두 차례나 혹독한 세무사찰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 명예회장은 그룹규모가 커지고 자신의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세 아들을 차례로 경영에 참여 시켰다. 이들은 한결같이 경기고를 졸업한 뒤 미국 대학에 유학했다.
1971년 장남 희철씨는 제일스레트 사장으로, 차남 희용씨는 한국스레트 대리로 입사했고, 3남 희근씨는 19079년 한국건업 중동본 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벽산그룹 창립 40주년을 맞아 제 2대 회장에 오른 김 창업주의 장남 김희철 회장은 국내 최초의 공학박사 출신 재벌총수로 평가 받았다. 그는 미국 퍼듀대학에서 기계학(학사)과 경영학(석사)를 공부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원자력공학 석사, 퍼듀대학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 회장은 학업을 마친 뒤 3년간 미주리-롤라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하다가, 정부의 해외 우수두뇌 유치에 의해 과학기술처 1급 연구조정관으로 초빙되어 국내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하다 1971년 10월 벽산그룹에 합류하여 20년간 부친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김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회장직을 넘겨받기 전에 (주)벽산을 비롯, 한국몰티션, 벽산니또보, 대한아이소플라소트 등 주로 건자재를 생산하는 계열사를 맡아 경영했다.
김 회장은 아내 허영자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으며 장남 성식씨(38)와 차남 찬식씨(36)는 현재 벽산건설에서 각각 구조본 전무와 외주자재담당 상무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김 명예회장의 둘째아들 희용씨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후, 연세대 법정대 2년을 수료한 뒤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상과대학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71년 벽산그룹에 입사한 이후 벽산그룹 기획감사실장을 거쳐, 한국건업 사장, 인희산업 사장, 동양물산 사장, 벽산그룹 부회장을 거쳐 2001년부터 동양물산기업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셋째아들 희근씨는 1979년 한국건업에 입사한 이후 7년 동안 중동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은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지역에서 매우 고전하던 시기였는데, 희근씨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건설업체의 생리를 익혀나갔다. 그는 벽산건설 및 벽산개발, 벽산엔지니어링 등 건설관련 계열사들의 사장직을 겸했다. 하지만 희근씨는 최근 김 회장을 통해 주식매입으로 벽산건설의 경영권을 찾았지만, 당시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희근씨의 경우 워크아웃 당시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벽산계열사의 경영에서 모두 손을 떼기로 했다.

김 창업주와 세 아들 …기독교 정신으로 기업 이끌어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이 벽산그룹에 합류하기 전에는, 강민구씨를 비롯한 창업공신들이 그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 창업주의 전 부인 윤현의씨의 친정집안 식구들과 김 창업주의 마산상고 후배들도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 초기 공신들은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을 비롯한 신진세력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대부분 그룹을 떠났다.
김 창업주의 두 남동생과 조카들은 애초부터 벽산그룹에 깊이 간여하지 않았고, 그나마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이 실세로 등장함에 따라 모두 벽산 그룹을 떠나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동생 인동씨만이 인희산업 재산인 서울 중앙극장을 임대 경영하고 있다.
김 창업주는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기업인’임을 강조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다. 그는 벽산그룹을 이끌어 오면서도 지난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는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서 미국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계회을 철회시키기 위해 민간외교를 펼치기도 했고, 개신교 교파들의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릴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벽산그룹은 90년대초 서울역 앞, 용상구 동자동 125번지에 그룹 신사옥 ‘벽산 125빌딩’을 짓고 창립 40주년을 맞아 준공식을 가졌다. 이에 따라 벽산그룹은 2세 경영체체를 구축함과 동시에 ‘동자동시대’를 개막했다.
2대 회장이지만 우여곡절을 겪고 최근 다시 한번 재도약의 기회를 맞은 김 회장은 50살이 훌쩍 넘은 벽산건설을 아버지 시대의 화려한 전성기를 꿈꾸며 사업을 이끌 계획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김 회장이 앞으로 벽산 그룹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또 그의 두 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얼마나 벽산그룹의 재도약을 준비할지 지켜봐야 겠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target=_blank>eli55@ilyosisa.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