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7탄> 한보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7탄> 한보그룹
91년 수서사건 위기 넘긴 경험으로 한보철강 인수 호소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경영에 실패한 재벌총수의 재기는 가능한가?
한국기업사에서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은 성공과 실패, 좌절과 재기를 되풀이해 왔다. 몇 차례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기업인들도 주변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재벌로 불렸던 기업들의 재기를 기대하는 재계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동안 국내 서열 50대 기업으로 분류됐던 숱한 재벌그룹들이 단 한 차례도 이같은 질문에 ‘Yes’라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서사건 재기 성공 이어질까

재벌그룹의 부도는 곧 파산으로 이어졌다. 창업세대의 성공과 2세 대물림에 의한 실패. 1백%는 아닐지라도 부도의 길을 걸은 재벌그룹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공통점을 남겼다.
그렇다고 부도재벌들이 재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지난 IMF를 전후로 쓰러진 재벌그룹들이 재기를 위해 뛰고 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지난 5월20일 오후 2시 예전 한보그룹 사옥이었던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에 정 전 총회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7년여만이다. 그는 이날 81세라는 고령이 무색할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재기의욕을 피력했다.
정 전 총회장이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사업은 한보철강 경영권의 재탈환이다. 한보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지난 97년 부도와 함께 경영권을 잃었던 한보철강을 되찾음으로써 재기에 성공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재기의욕은 과거 한차례 성공을 거두었던 경험이 있기에 한층 더하다.
정 전 총회장은 지난 91년 2월 수서사건으로 경영권을 잃을 뻔한 위기를 한차례 겪었다. 권력핵심부를 포함한 정치권을 일거에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은 검은돈을 앞세운 로비로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대표적인 정경유착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뇌물공여죄로 구속됐던 정 전 총회장은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비도덕적인 기업의 해체라는 여론에도 그는 엄청난 추가금융지원을 받으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때문에 이번에도 한보철강 인수와 함께 건재를 과시하려는 꿈을 정 전 총회장은 꾸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총회장이 내세우고 있는 한보철강 경영권 재탈환의 명분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부도가 났으며 자신도 이에 상응하는 벌을 지난 7년 동안 받았다는 데에 있다. 특히 한보철강을 설립했기에 현재의 부실과 정상화 방법도 가장 잘 알고 있다면서 자신이 인수하는 게 당연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장남 정종근
차남 정원근
3남 정보근
4남 정한근

“한보철강 정상화 나밖에 없다”

그는 기자회견장에서도 “한보철강의 입지선정 과정에서부터 모든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에 한보철강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한보철강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보철강 부도의 직접 책임자로서 그동안 채권자와 국민경제에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해 심각히 반성하고 있으며 이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당진제철소를 종합 완공해 부채 원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감성에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의 이 같은 재기집념에도 채권단과 철강업계, 그리고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다. 국가적인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IMF를 촉발시킨 한보철강의 옛 사주가 다시 경영일선에 나선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게다가 차입금을 조달해 이의 재탈환을 꿈꾸고 있다는 데 대해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 전 총회장이 한보철강 인수를 위해 구성한 컨소시엄은 ‘보광특수산업’. 한보철강만 인수하면 총부채 6조1천억원 중 3개월 내에 외자도입을 통해 우선 5천억원을 상환하고 3년 내에 추가로 1조원을 갚을 계획이라는 것이다. 또 나머지 4조6천억원은 향후 16년간 균등 상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은 지난 4월 예비실사 대상업체 선정에 이어 5월25일 마감된 입찰제안서 접수에서도 자격미달로 입찰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회사정리법(221조)에 따라 부도를 일으킨 임직원은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이와 관련 보광특수산업 이용남 사장은 “현재 청와대 당국에 진정서를 보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지게 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라며 “차후 입찰과정을 지켜보고 대책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보철강 매각은 6월중 우선협상 및 예비협상대상자를 선정하고 이후 본실사와 가격협상 등을 거쳐 오는 8월9일께 본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매각이 완료될 예정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신화

이처럼 과거와 달리 정 전 총회장의 재기를 가로막고 있는 직접적인 요인은 시대변화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는 과거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을 벌였다. 정관계 로비나 언론플레이 등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이었다. ‘로비의 귀재’라는 별명이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이에 연유하고 있다.
말단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51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해 10여년 만에 재계랭킹 50위권에 진입했던 쾌속성장은 이 같은 그의 특출난 로비력과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사업과는 동떨어진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또 사돈들과는 거의 접촉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고 며느리들에 대해 마뜩찮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정 전 회장은 평소 며느리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결혼 후 2년 동안은 꼭 함께 살았던 그는 며느리들이 골라주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즐겨 입고 맸던 한편 아무리 바빠도 이들과 자주 대화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전 총회장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부친 정용석씨와 모친 황맹옥씨의 1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집안 탓에 초등학교만을 다닌 그는 부두노동자 등으로 힘든 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정 전 총회장에게는 모두 3명의 부인이 있다.
26세 되던 1949년 결혼한 김순자씨(사망)가 첫 번째 부인이다. 결혼 후 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산경남지역 일선 세무서에서 하위직인 주사보로 일하다 한국전쟁 후 조그만 운수사업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포기해야 했다.
첫째 부인의 사망으로 정 전 총회장은 서울로 거처를 옮겼고 여장부란 말을 들었던 이수정씨를 만나 재혼했다. 이때 정 전 총회장의 나이 38세, 이수정씨의 나이 23세였다.
부인 이수정씨는 남편이 큰일을 하게 될 사람이라 믿었고 결국 70년대초 일제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이를 수출하는 한보상사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의 밑천은 부인이 모아놓은 곗돈 1백만원과 27평짜리 집을 담보로 얻은 2백만원 등 모두 3백만원이었다.

사업의 파트너 둘째 부인

결국 정 전 총회장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고 또 성공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고 터준 이가 두 번째 부인 이수정씨였던 것이다.
특히 이씨는 남편 이상으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정 전 총회장은 몰리브덴수출이 성과를 거두자 주택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한보주택의 모태가 된 서울 구로동 아파트 신축사업 당시 이씨는 몸페를 입고 일꾼들의 새참을 날랐으며 은마아파트를 건설할 때에는 운영자금을 구하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또 암으로 입원해 있으면서도 회사 일을 챙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 전 총회장도 이씨를 만나서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졌다고 믿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83년 부인 이씨가 암으로 타개하자 경기도 김포의 부인 묘소를 호화분묘라는 비난에도 5~6개월에 걸친 모역조성작업을 통해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만큼 부인 이씨에 대한 정 전 총회장의 애정이 각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훗날 첫째 아들을 제치고 셋째 아들이 한보그룹 회장에 취임한 것도 부인 이씨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만큼 둘째 부인 이씨는 정 전 총회장에게 사업의 동반자였고 그룹의 자금원이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총회장의 셋째 부인은 이영자씨로 결혼식은 당시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84년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한보가 효성으로부터 인수한 한인골프장(현 태광골프장)에서 골프장을 휴장시키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거행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딸이 태어난 이후 오랜 별거생활로 이어졌다.

통혼보다는 사업적 인맥 풍부

정 전 총회장은 이들 3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2녀를 두었다. 지금은 사망한 장녀 희자씨를 비롯해 장남 종근씨, 차남 원근씨, 3남 보근씨, 4남 한근씨, 그리고 차녀 윤지씨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첫째 부인에게서는 희자씨와 장남 종근씨를, 둘째 부인에게서는 차남 원근씨와 3남 보근씨, 4남 한근씨를 두었고 셋째 부인에게서는 차녀 윤지씨를 얻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 자녀들의 결혼에서 특이한 혼맥도는 찾아지지 않는다. 평범한 통혼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사업가 이영운씨와 환일고 교장을 역임한 김예환씨, 제일병원과 우신향병원 의사였던 김승훈씨가 정 전 총회장의 사돈들이다.
첫째 며느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환일고 교장을 역임한 김예환씨의 막내딸인 둘째 며느리 은영씨는 영국 왕립음악학교 로열아카데미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도로 알려져 있다. 특히 4년간의 연애끝에 결혼에 성공한 원근씨와 은영씨는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이 중매로 이루어졌다. 원근씨와 친구인 정 회장이 영국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던 은영씨를 원근씨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정 전 총회장도 이들이 연애하고 있던 시기 영국으로까지 가서 은영씨를 만났고 매우 흡족해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을 독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 전 총회장에 이어 한보그룹의 대권을 이어받았던 3남 보근씨는 아버지를 빼어닮았다는 평과 함께 정 전 총회장의 사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수정씨의 아들로 끔찍한 애정을 받으며 자랐다. 정 전 회장의 부인은 김정윤씨로 손윗형인 원근씨의 장인인 김 교장의 중매로 결혼했다.

두 번의 정경유착 대형사고 재벌

이처럼 단촐한 정 전 총회장의 혼맥도는 ‘로비의 귀재’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다. 때문에 한보그룹은 통혼보다는 정 전 회장의 정관계 실력자들과 여러 형태로 맺었던 관계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대표적인 실력자는 정 전 총회장의 세 번째 결혼식 주례를 섰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과 역시 결혼식 축하케이크를 잘랐다는 홍성철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또 광업공사 사장시절의 김복동 전 국회의원, 하키협회장을 맡으면서 알게 됐다는 박세직 전 서울시장과 장병조 전 청와대비서관을 비롯해 5공 시절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을 건립, 기증한 것이 인연이 됐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며 대한노인회장을 역임한 이규동씨가 그들이다. 특히 이규동씨와의 인연은 정 전 총회장을 군관계의 실세와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돼 사업에 활용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건설부, 서울시, 국세청 출신들로 짜여진 관계 출신 인사들의 잇따른 영입은 한보그룹의 로비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보주택 사장을 역임했던 강병수(전 서울시 올림픽준비단장), 한보탄광 사장을 역임한 박형원(전 관악구청장), 류기동 전 건설부 주택국장, 이병주 전 전남국토관리청장, 전 경우 전 건설부 국립지리원장, 한보상사 사장을 역임한 우장현(국세청 출신) 등이 여기에 속하는 인물군이다.
한보그룹의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됐던 사업은 역시 주택사업이었다. 서울 구로동에 1백72가구를 지어 분양에 성공한 정 전 총회장은 이후 삼아건설을 인수, 한보주택으로 바꿔 본격적인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매년 규모를 늘려나갔던 한보주택은 77년 급기야 1천3백30가구를 분양하며 대형업체로 발돋움했다. 3백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4년만에 20억원으로 불어난 것도 이같은 주택사업의 번창 덕이었다. 특히 78년 한보주택은 전자금을 몽땅 털어넣은 이른바 ‘올인전략’으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4천4백24가구의 은마아파트를 건설, 분양에 나섰고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붐을 타고 수천억원의 돈이 가만히 앉아있는 정 전 총회장의 손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 자금을 밑천으로 정 전 총회장은 84년 금호철강을 인수, 오늘날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고 있는 한보철강을 설립하게 됐다.
한창 급성장했을 때 한보그룹의 재계 랭킹은 30위권으로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86년을 기점으로 한보그룹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적자를 면치 못했던 한보그룹은 감량경영과 계열사 처분 및 합병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고 회생을 노렸다. 이때 훗날을 기약하며 정 전 총회장은 택지개발예정지구로 고지될 것 같은 녹지를 미리 사들였고 탁월한 로비력을 동원해 이를 택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추락하던 한보그룹은 다시 되살아났지만 이 같은 변칙적인 그의 사업행태는 91년 수서사건으로 폭발하면서 치명타를 입었고 97년 다시 비자금사건으로 재계에서 퇴출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저무는 ‘로비시대’의 한보그룹

정 전 총회장과 한보그룹을 말할 때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룹 사옥이 없다는 것이다.
“목수가 자기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말을 곧잘 했던 그였던 만큼 한보그룹의 사옥은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 몇 개층이었다.
또 그는 관상가·점술사·스님 등의 조언을 받으며 사업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무공무원을 그만두고 강원도 탄광을 인수하며 사업가의 길을 걸을 때도 그는 역술인의 예언을 따랐다. 자신의 이름을 태준에서 태수로, 종로1가의 정씨종친회 사무실이 명당이라는 이유로 로비의 장소로 사용했던 것은 모두 이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특히 90년말 그룹 제2의 창업으로 내선 한보철강의 아산만철강단지 건설공사의 착공일도 어느 스님이 정해준 12월29일을 고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년만에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의 옛 사옥을 찾아 재기를 꿈꾸고 있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 그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로비’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현재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은 한보철강 경영권 재탈환이라는 그의 야심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행보가 주목된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