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상인 성품으로 태평양을 반석위로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신용과 근검절약을 밑천으로 하는 개성상인의 체취를 물씬 풍기는 하는 기업인으로 유명한 고 서성환 태평양그룹 창업주(이하 서 창업주·작고)는 ‘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로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서 창업주는 특히 다도에서 나온 신중과 평정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서 창업주는 뛰어난 마케팅 전략으로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오늘날의 태평양 그룹으로 이끈 반면 자녀들의 혼사에 있어서도 정도(正道)를 걷길 원했다. ‘사람 됨됨이’로 가족을 받아들이는 소신있는 ‘혼사’를 진행하고 싶어했던 것. ‘정관계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의 측근의 설명이다.
하지만 서 창업주의 2남 3녀들은 대부분은 70·80년대 당시 정재계를 주름잡던 화려한 가문과 백년가약을 맺어 정재계의 다양한 방향으로 혼맥을 뻗어 나갔다.
서 창업주는 1923년 7월 14일 황해도 평산에서 부친 서대근씨와 모친 윤독정씨의 3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성상회·태평양화학 공업사로 출발
서 창업주가 소학교 1학년 시절 때 그의 가족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주했다. 상인의 도시 개성은 후에 그의 기업경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서의 소년 서성환은 집안에서 운영한 창성상회라는 잡화상을 형들과 함께 도왔다. 창성상회는 당시 인기품목이었던 화장품을 취급했는데, 이는 나중에 서 창업주의 창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서울에 진출한 서 창업주는 한국 최초의 화장품 회사인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창립했다. ‘태평양’이란 상호는 누구나 잘 아는 바다 이름이며, 웅지를 나타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태평양화학공업사는 지금의 태평양그룹의 전신인 셈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78년까지 태평양화학 사장을 지냈으며, 이후 태평양그룹 회장과 태평양돌핀스 구단주(1987~1995), 태평양(주) 대표이사 회장, 태평양종합산업(주) 회장 등을 역임했다. 기업 경영 외에도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 상장회사협의회 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대한농구협회 회장, 신탁은행확대이사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국 경제 및 체육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서 창업주는 이후 국학대학교 정치학과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초기 근면과 신용이라는 개성상인 특유의 성격을 유지해 사업을 일으켜 만든 서 창업주의 최초 화장품으로는 ‘ABC 포마드’ ‘100번크림’ 등으로 태평양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히트작들이다. 특히 그는 도매상을 배제하고 소매상과 직접 거래하는 특약점제도를 도입하고, 미용사원제도, 아모레 아줌마 등 독특한 방문판매 전략을 구사해 한국 화장품 유통에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태평양을 국내 최대의 화장품업체로 끌어 올렸다. 1958년에는 국내 최초의 사외보이자 여성 교양지인 ‘화장계’를 발간했다. 1979년에는 국내 최초의 화장품 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을 설립했고, 2001년에는 제주도에 설록차박물관을 개관했다.
1970년대부터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태평양은 제약·식품·보험·증권·전자·금속 등 다양한 사업에 진출했다. 이와 함께 프로야구단까지 인수하는 재력을 과시했다.
태평양그룹은 모기업인 (주)태평양을 비롯해 (주)태평양제약·태평양개발(주)·태평양종합산업(주)·(주)아모스프로페셔날·(주)에뛰드·(주)태평양금속·장원산업(주)·태신인쇄공업(주) 등 10개 계열회사를 보유, 시가총액 1조7천2백97억원으로 화장품 시장에서 43%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룹 본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181번지에 있으며, 부속기관으로 화장품과 차 분야의 전문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이 있다.
그룹의 개인주주로는 서 창업주의 차남 서경배 사장이 26.14 %로 시가총액 4천5백21억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차녀 서혜숙씨가 0.96%로 시가총액 1백66억원, 3녀인 서은숙씨가 0.81%로 시가총액 1백40억원, 기타 심상배씨가 조금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태평양 혼맥 …재계 혼맥도의 중심역할
서 창업주는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 슬하에 송숙(57), 혜숙(54), 은숙(51), 영배(49), 미숙(47), 경배(41)로 2남 4녀를 두어 이들을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 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여섯 사돈가 가운데는 김일환 제17대 내무부장관(작고), 최두고(83) 전 국회의원, 정운갑 제13대 농림부 장관(작고), 서봉균 제22대 재무부 장관(78), 김치열(83) 에이오에스 회장(제27대 법무부 장관, 제37대 내무부 장관), 김영생 전 국민당 국회의원, 정재문 현 한나라당 부산 부산진갑지구당 위원장(대양산업 회장), 김도창 전 법제처장(김도창법률사무소 대표) 등 정관계 인사가 8명이며, 언론인은 방우영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있다. 또 나머지 최주호 전 우성그룹 회장(작고),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박세정 전 대선제분 회장(작고) 등의 여러 기업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서 창업주는 재벌가 혼맥에서 다른 그룹에 못지 않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는 대부분의 자녀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이름’과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계 출신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어난 뒤에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관계에서 전혀 무관하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
서 창업주 세 딸들 … 정관계 가문의 며느리로
숙명여대 무용과 출신인 장녀 송숙씨는 박세정씨의 장남인 내회씨와 결혼했다. 내회씨는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박사 출신으로 서강대 상경대 학장을 역임했다. 내회씨의 부친인 박세정씨는 대선제분 외에 조흥화학·계동물산 등을 운영한 바 있는 기업가다.
하지만 차녀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씨와 19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출신이자 상공·내공·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관료 출신이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현 장원산업 회장이다. 의광씨는 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건설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부산에서 동성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룡씨와 1977년 결혼했다. 상룡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고려대 의대 일반외과 부교수로 활동했다.
막내딸인 미숙씨는 숙명여대 미대 출신으로 최승진 전 우성타이어 대표이사와 결혼, 재벌가 혼사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승진씨는 부친 최주호 전 우성그룹 회장을 대신해 오늘의 우성을 이룬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아들 조선일보가와 농심가와 사돈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부사장을 시작으로 현재 태평양개발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씨(45)와 1983년에 결혼했다.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서씨 집안의 며느리가 됐는데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1990년 10월, 농심 신춘호 사장의 막내딸인 윤경씨(36)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자주 접해, 평소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자별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제로 91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전무를 비롯해 현재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서 창업주의 혼맥도는 이 같은 유력 집안과 연결되면서 재벌 혼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90년대 농심의 신춘호 집안과 연결되면서 박남규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작고), 김치열 에이오에스 회장(제27대 법무부 장관, 제37대 내무부 장관)과 고리를 맺고 있다. 또 장녀 송숙씨의 시아버지인 박세정 회장을 통해서는 정운갑 전 농림부 장관, 남상진 제24대 재무부 차관(구 서울신탁은행장)과 연결되며, 차녀 은숙씨의 시아버지인 김일환 전 내무부 장관과는 최낙권 전 국회의원, 배영호 전 부산제철사장 등과도 순환 혼맥을 형성했다.
국내 재벌가 혼맥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태평양 그룹 관계자들은 “절대 정략적인 혼사는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사돈가의 면면을 보면 한결같이 정재계에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들이다.
서 창업주는 태평양이 일정궤도에 진입하면서 후계구도를 구축했다.
서 창업주가 타계한 2001년전까지 그는 장·차남을 일선에 내세워 경영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는 장남인 영배씨에게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주재 전무를 거쳐 태평양증권, 태평양개발 회장직을 수행하게 했다. 차남인 경배씨는 그룹 기획조정실 전무를 시작으로 경영수업에 참여시켰다.
서 창업주의 개성상인의 특유 기질을 물려받은 두 아들은 현재 태평양 그룹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늘날 30대 그룹 계열에 올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는 태평양의 면모를 꾸준히 유지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target=_blank>eli5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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