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
2남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
3남 김석동 잇츠티비 회장 |
장녀 김인숙 전 국민대학 교수 |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3탄> 쌍용그룹
서울·영·호남 두루 사돈관계 … 팔도혼사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3월부터 쌍용건설 매각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쌍용그룹의 오너 일가가 쌍용건설을 인수, 재기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쌍용건설 매각은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이 매각 결정을 한데 이어 매각주간사 선정을 마치는 수순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쌍용건설은 옛 쌍용그룹 계열사 가운데 오너였던 김석원 전 회장(쌍용양회 명예회장) 일가의 지분이 가장 많다. 재계에서는 김석원·김석준(쌍용건설 회장) 형제 등 옛 오너일가가 쌍용건설을 통해 재기에 성공할지 주목하고 있다.
쌍용건설은 쌍용그룹 고 김성곤 창업주 일가의 마지막 보루다. 현재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창업주의 장남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일가 등이 대략 5%의 지분을 보유중이다. 나머지 계열 기업의 경우 지난 98년 이후 감자 등의 과정을 거치며 오너일가 지분이 거의 사라졌다.
쌍용자동차는 이미 중국의 란싱그룹이 인수 우선협상 대상자로 지정돼 실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며 쌍용양회조차 채권단이 주식으로 전환 가능한 전환사채(지분 55% 해당)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일본의 태평양 시멘트가 2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김석원 명예회장도 보통주 기준 2% 안팎의 지분을 가졌으나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이외에 쌍용해운, 쌍용자원개발, 쌍용머티리얼, (주)쌍용 등의 대부분 계열사는 김 명예 회장의 지분이 미미해 실질적으로는 절연 관계다. 현실적으로 그래도 옛 쌍용그룹 오너일가가 건질 만한 기업은 쌍용건설밖에 없다는 평가다.
여의주를 둘러싼 두 마리 용의 승천 … 김성곤 창업주
쌍용건설의 최대주주는 자산관리공사(38.75%)지만 우리사주조합이 20.07%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는 채권금융기관이 19% 안팎을,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과 쌍용양회 등이 7.7%를 각각 보유중이다. 쌍용그룹이 해체 수순을 밟기 전 쌍용건설은 김석준 회장 몫으로 분류됐다. 이에 따라 김 회장은 워크아웃 상태에서도 쌍용건설을 맡아 지난해 매출 1조 3백여억원, 순익 6백억원의 우량회사로 살려놨다. 이에 따라 쌍용건설이 매각될 경우, 되사고 싶은 욕심은 많지만 지분을 모두 사들일 형편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형인 김석원 명예회장은 예우차원에서 쌍용시멘트 명예회장으로 있을 뿐 자금력은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채권단으로부터 우선매수청구권을 확보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더 사들이고, 김석준 회장이 또 일부 주식을 매입하게 되면 현 김석준 회장 체제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쌍용건설 우리사주조합은 매각시 지분매입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외국 건설사의 인수소문이 나도는 등 인수의사를 내비친 기업들 사이에서 쌍용건설이 쌍용그룹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쌍용그룹의 모태는 1939년 성곡 김성곤 창업주가 설립한 소규모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 이후 1948년 고려화재해상보험(주)와 금성방직(주)를 잇달아 설립하며 사세가 확장됐다. ‘쌍용(雙龍)’이라는 명칭이 회사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62년 쌍용양회(주)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쌍용양회를 설립할 당시 김성곤 창업주는 공장부지인 강원도 영월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을 주목했다. 전설에 따르면, 영월군 서면 쌍용리의 쌍용굴에 두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승천을 위해 천년간 정진하다 하나의 여의주를 받았다. 그러나 두 마리 용은 서로 여의주를 양보하다 결국 모두 승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옥황상제는 감동해 또 하나의 여의주를 내려보냈고, 결국 두 마리 용 모두 승천하게 되었다는 것.
‘가문보다 사람됨됨이를 중시’
김성곤 창업주는 이 전설에 감화돼 전설 속의 쌍용을 회사 이름으로 따왔다. 이때부터 기업의 이름을 하나 둘씩 쌍용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쌍용그룹이 탄생했다.
성곡 김 창업주는 자신의 표현대로 ‘고삐 풀린 말’처럼 하고 싶은 바를 성취하고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62년의 생을 마감했다. 대구에서 상공은행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 그는 사업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인으로 언론인으로 사회사업가로 정열을 불태웠으며, 유도 8단이던 그는 체육진흥에도 열의를 보였던 체육인이었다.
김 창업주의 생활신조는 “술을 마실 때는 남보다 먼저 취하지 말 것,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들을 것, 돈 무서운 줄을 알 것, 모든 사람에게 깍듯이 친절할 것”이다.
특히 김 창업주의 성품과 다양한 경력은 6남매의 혼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사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소규모 운수업자로부터 의사,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다른 재벌 그룹의 혼맥과는 달리 화려하지는 않다. 가문보다 사람됨됨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혼맥의 특징이라면 서울과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쌍용그룹은 전국 각지에 공장과 시멘트 사일로를 갖고 있다 해서 스스로 팔도강산그룹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혼사 역시 팔도혼사인 셈이다.
영·호남 두루 사돈관계 형성
김 창업주는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부친 김광도씨와 모친 김봉옥씨의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25세때인 1937년 포항 영흥 공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18세의 김미희씨와 결혼했다. 김 창업주는 슬하에 인숙(66), 의정(64), 석원(60), 의령(56), 석준(52), 석동(44)의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 2세 가운데 위로 두 딸과 장남만 김 창업주 생전에 결혼했다.
김 창업주는 먼저 둘째딸인 의정씨를 출가시켰는데 의정씨의 배필은 전북도립병원장을 지낸 고 이관호씨의 차남인 이승원씨(72)다. 그는 90년대 쌍용그룹 부회장, 쌍용제지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한 의정씨는 23세때 당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섬유연구소실험실 부실장이던 승원씨와 결혼했는데, 김 창업주가 승원씨를 사윗감으로 맞아들인 데는 승원씨의 형인 고 이승보씨가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승보씨는 동양통신 전무, 언론인 등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대한통신 시절부터 김 창업주의 총애를 받았다. 승보씨는 금성방직을 경영하고 있던 김 창업주를 만날 때마다 당시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다니던 동생 승원씨에 관해 얘기를 해 김 창업주가 미리 사윗감으로 점을 찍었다.
김 창업주의 장녀인 인숙씨(전 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 사회과학부 사회학전공 교수)는 국제사이언스 클럽 회장이었던 조병준씨의 장남 해형씨(71)와 1964년에 화촉을 밝혔다.
해형씨는 현재 나라기획 회장, 나라홀딩 회장, 나라엔터프라이즈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결혼 당시 인숙씨는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후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체류 중이었고 해형씨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책임연구원이었다. 인숙씨 부부가 보스턴에서 결혼할 당시 신랑측 가족대표로 참석한 장예준씨는 조병준씨의 처인 고 장화순 여사의 조카다. 조병준씨는 호남비료 부사장 등을 역임했었고 김 창업주와 사돈관계를 맺은 후 쌍용양회 사장과 회장, 고려화재 회장 등을 지냈다.
김 창업주의 셋째 딸인 의령씨는 1971년 숙명여고를 졸업한 후 인테리어디자인 등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소규모 인테리어 사업을 직접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창업주의 장남 석원씨(60)는 엄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라나 엘리트교육을 받고 순탄한 성장가도를 걸었다. 개인적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도 겪어야 했다. 석원씨는 첫부인과 결별한 뒤 1981년 박문순씨와 결혼했다. 부산여고와 수도여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부산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문순씨는 친척의 중매로 석원씨를 만나게 됐다. 결국 부자 2대에 걸친 교사와의 혼사가 이뤄진 셈이다. 문순씨는 소규모 운수업을 경영하던 박남표씨의 3남 3녀 가운데 장녀다.
김 창업주의 둘째아들인 석준씨(쌍용건설 대표이사 회장)는 1977년 한국해외수산 회장으로 있던 이봉래씨의 2남2녀 가운데 장녀인 인실씨(50)를 배필로 맞았다. 인실씨는 미국 캐리포니아대학 음대 출신. 석준씨와 인실씨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석준씨의 모친과 인실씨의 모친이 불교선도회에서
만나 자녀들의 혼사를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성혼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내아들인 석동씨는 1986년 미국 웨슬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보스턴은행에 근무한 한준희씨(43)와 4년 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쌍용투자증권 부장, 굿모닝증권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했던 석동씨(현 잇츠티비 회장)는 결혼 당시 조시타운대학 대학원에서 외교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시티뱅크에서 근무 중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석동씨는 1983년 브라운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절 웨슬리대학에 다니던 준희씨를 만났다. 준희씨의 부친은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 사무처장 등으로 활약했던 한상태씨다.
조촐한 혼맥도 이면엔 각 그룹 및 전·현직 대통령가와 연결
김 창업주의 2세 결혼과정에서 나타나듯 김성곤 가문의 사돈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첫째 사위 나라기획 조해형 가문을 추적해 보면 전 상공장관인 장예준 가문, 전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총재였던 임송본 가문, 대한전선 설경동 창업주 가문, 대농의 박용학 가문, 국제그룹의 양정모 가문, 경방의 김용완 가문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라 김용완 가문과 연결되는 럭키금성그룹 구인회 가문을 만나면서 역시 김성곤 가문의 혼맥도 여러 단계를 거쳐 내로라 하는 국내 각 그룹 및 전·현직 대통령 가문과 연결된다.
김 창업주의 혼맥도가 단출하듯 가계도 또한 단출하다. 6남매의 2세 가운데 3녀 의령씨가 결혼을 안해 김 창업주로부터 출발한 가계는 직계 2세와 친·외손 포함해 모두 27명에 불과하다.
쌍용그룹과 함께한 김석원·김석중 형제
장남 김석원씨는 국민학교 3·4학년을 일본에서 다녔고 서울고등학교와 서강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석원씨는 미국 유학시절 매달 송금되는 50달러의 빠듯한 학비 때문에 유학 6년 내내 시간당 1달러 짜리 접시닦이도 했다. 그는 경영을 맡은 이후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당시에 받은 세금계산서를 소중한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석원씨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4학년 1학기만을 마친 채 그룹 경영을 위해 급히 귀국했다. 석원씨는 선대 회장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을 당시 다섯 개에 불과하던 계열사를 90년대 국내 22개, 해외 21개로 늘리기도 했다. 그룹 매출액도 60배로 성장시켜 국내 재벌 랠킹 6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석원씨는 또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76년부터 정유·중공업·건설·증권·자동차 등 현재 그룹 주력 기업으로 자리하고 있는 각종 계열사를 설립했거나 인수, 왕성한 의욕을 보였다. 특히 용평스키장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추진, 어느 계열사보다 애착을 갖기도 했다.
석원씨는 대권을 이어받은 후 원로들의 자문을 받아 창업공신에 예의를 갖추면서 퇴진시켰다. 바로 이러한 무리를 삼가면서도 조속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시키고 있어 재벌 2세 가운데 모범생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IMF이후 워크아웃 절차를 밝게 되면서 많던 계열사의 지분도 점점 쇠약해져 쌍용그룹이라는 위상은 많은 쇠퇴했다. 실질적으로 쌍용그룹의 면모를 잇고 있는 기업은 쌍용건설뿐이며 이마저도 매각대상에 놓여있다. 최근 석원씨는 쌍용 등기이사를 사퇴, 명예회장 신분만 유지하고 있다. 쌍용양회에서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갖고 있던 공식 직함인 등기 이사에서도 물러난 것. 쌍용양회는 지난 4월19일 개최된 주주총회에서 석원씨가 2002년부터 유지해 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밝혔다. 석원씨는 이름뿐인 명예회장 신분만 유지하게 됐다. 석원씨는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출자한 2000년부터 지분이 줄어들어 현재 1.96%의 지분만을 갖고 있으며 등기이사 유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사직을 사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원씨의 두 동생 석준·석동씨는 90년대 건설과 증권부분에서 석원씨를 보필했다. 이들 3형제 가운데 석원·석준 두 형제는 모두 해병대를 제대했다. 석원씨는 훈련 과정이 힘들기로 유명한 해병대에 1970년 유학생활을 마친 뒤 바로 지원 입대, 월남의 최전방에서 생활했고, 석준씨도 1970년 지원입대했다.
특히 둘째 동생인 석준씨(쌍용건설(주) 회장)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졸업했으며, 1994년 쌍용그룹 총괄 부회장을 시작으로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1995부터 1998년까지 쌍용양회공업(주)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쌍용그룹(쌍용건설)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target=_blank>eli5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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