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동양그룹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동양그룹
슬하에 오직 두 딸만 둬 사위들에 의한 최초의 재벌경영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국내 재벌그룹의 사위경영시대를 연 첫 주자다. 현 회장 이후 여러 기업에서 사위들이 CEO에 오르기도 했지만 여전히 재벌총수라는 자리에 앉은 이는 현 회장이 유일하다. 그만큼 현 회장의 재벌총수로서의 이력은 타 그룹총수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최초의 사위 재벌총수

현 회장을 가리켜 소리없이 실속을 챙기는 기업경영인으로 평가한다. 활발한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내실을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다. 최근 TV드라마에서 흔히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재벌가 딸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고, 이어 기업경영권을 차지하는 톡톡 튀는 능력의 남자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행보가 이 같은 경영스타일의 평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동양그룹의 문화 역시 현 회장의 경영스타일과 비슷하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홍보를 하는 재벌그룹이 아니다. 총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기업의 이미지를 꾸며서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착실히 갈 길을 가면 된다는 게 동양그룹의 기업문화다.
동양그룹의 21세 비전에서도 이 같은 기업문화는 한층 두드러진다. 내실경영을 토대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모든 변수에도 철저한 준비로 대비해 세계 최정상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수익을 내고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업에 핵심역량 집중과 환경변화에 따른 전략적인 사고에 의한 동양만의 독창적인 사업영업 개척이 그 내용이다.
이와 관련 현 회장도 올해 초 “지난해의 성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하며 질적인 성장을 한층 힘차게 전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현 회장의 경영비전은 지난 89년말 장인인 고 이양구 회장에 이어 그룹회장에 취임한 이후 줄곧 그림을 그려왔던 장기구도 아래 이뤄지고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취임 당시 창립 30주년을 맞아 제2의 창업을 선언했던 현 회장은 그룹을 떠받치고 있던 금융·제조·식품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삼각 형태를 유지토록 한다는 기본구상을 밝힌 바 있다. 특히 금융분야에 대한 현 회장의 각별한 관심과 열정은 지금까지도 동양그룹이 금융전문그룹으로 불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상윤 고려대초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 법사위원장
손경식 CJ대표이사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창업주

검사에서 기업경영인으로 변신

현 회장은 경영수업을 쌓기 위해 80년대 초반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유학했으며 재무관리를 전공, MBA를 취득했다. 현 회장은 훗날 “유학기간 중 국제적인 감각을 익힐 수 있었고 금융업에 눈을 뜨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동양그룹은 현 회장 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한 지 1년만인 지난 84년 일국증권을 인수, 동양증권으로 상호를 바꿔 증권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불과 5년만에 25개 증권사 중 업계 10위의 건실한 회사로 키워냈다. 이에 창업투자회사와 생명보험업에 진출하는 등 금융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현 회장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일대 변화를 예고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중에 12회 사법고시에 합격,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던 현 회장이 재벌가의 사위가 된 데에는 고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다리역할을 했다. 고 김 전 총장은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과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고 김 전 총장의 중매로 당시 이화여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고 이 회장의 맏딸 혜경씨와 현 회장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현 회장이 결혼을 통해 신분이 급상승한 것은 아니었다. 검사라는 직업도 직업이었지만 현 회장의 집안 역시 고 이 회장 집안 못지않은 명망가였다. 고 이 회장의 집안이 부를 가졌다면 현 회장의 집안은 학식과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현 회장의 부친은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현인섭(1963년 타계)씨. 또 조부는 고려대 초대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불리는 현상윤씨다.
특히 현 회장은 결혼과 함께 처가의 경영참여 요청에 기업인과 법조인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 19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동양그룹에 첫발을 내딛으며 기업인을 선택, 그의 인생의 일대 변신을 하게 된다.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의 분리

현 회장이 그룹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83년. 아들이 없는 고 이 회장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서 맏사위인 현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 이때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 사장에 취임하면서 장인의 역할을 대신했다.
사위의 경영전면 배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재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둘째 사위 담철곤 오리온제과 회장이 당시 동양제과 임원으로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탓에 호사가들은 분가냐, 경영권 다툼이냐를 입방아에 올리기도 했다.
고 이 회장은 슬하에 아들 없이 두 딸만 두었다. 현 회장의 부인인 혜경씨와 둘째 딸 화경씨로 담 회장은 화경씨의 남편이다.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담 회장을 미팅에서 만나 1980년 결혼에 성공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유학 중 수백 통의 편지가 태평양을 넘나들었을 만큼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명하다. 특히 재벌가의 막내딸이 화교 출신인 담 회장과 사귀고 있다는 데에 재계의 관심은 한층 더했다. 부친은 담연성씨로 개인사업을 했던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담 회장은 대학 4학년 재학중 동양제과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마케팅 부문을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어 1987년 동양제과 사장에 취임하면서 능력을 발휘해 연속 히트상품을 출하하면서 제과업계에 동양의 무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01년 9월 동양제과(현 (주)오리온)를 중심으로 유통, 미디어, 영화, 엔터테인먼트 등 관련 16개사를 동양그룹으로부터 분리, 새롭게 출범한 독자적인 오리온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오리온그룹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제과사업과 함께 유통, 미디어, 영화, 외식 등의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90년대 초 2천~3천억원대에 불과하던 외형도 2002년 말 기준으로 매출액 1조2천여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특히 제과사업에서의 탄탄한 성장력을 발판으로 향후 외식, 미디어,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사업과 제과 해외사업에 핵심역량을 기울여 ‘먹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까지’를 추구하고 있다. 즉 국내 최고의 식품회사는 물론 국내 최대의 토탈 엔터테인먼트그룹으로의 도약이 오리온그룹의 경영비전이다.
이처럼 동양그룹의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가계도는 두 딸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혼맥이 전부다. 두 사돈에 의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혼맥 역시 현 회장쪽에서 이인기 전 영남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 등이 연결되지만 그룹 규모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혼맥이다. 특히 담 회장이 화교라는 점에서 동양그룹의 혼맥은 현 회장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고 이 회장은 자녀들의 혼사에서 철저히 권력과 재산, 집안을 배제했다. 오직 사람 됨됨이만을 살폈다.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었던 그로서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을 맡겨야 할 사윗감은 곧 후계자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맏딸 혜경씨에 따르면 고 이 회장은 학벌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양보를 아는 사람을 택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인간의 성품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혜경씨는 받아들였다.
둘째딸 화경씨 역시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그러시더니 ‘그래, 사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시면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말한다.
물론 고 이 회장에게 형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와 형이 모두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혈혈단신 월남

고 이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부친 이교흠씨와 모친 김성자씨의 2남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중농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6세 때 부친이 별세, 가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학교를 마친 고 이 회장은 15세 때 일본 모리나가 계열사인 함흥물산 사원으로 입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꿈은 ‘국내 최대의 제과회사 주인’이었다.
비록 학교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입사 당시 그의 급여는 13원(쌀 한 가마 값은 6~7원). 그러나 입사 3년만에 37원을 받는 정식사원이 됐으며 6년만에는 대졸 일본인도 어렵다는 60원의 간부직에 앉았다.
이 시기를 고 이 회장이 기업관을 체득한 시기로 분류하는 게 일반적이다.
고 이 회장은 당시 함흥물산의 시노자키 사장으로부터 “상인으로서 대성하려면 정직을 자기 목숨처럼 알아야 한다”는 경영관을 배웠다고 한다. 즉 “일본인에게서 정직·봉사·근면 등 장사꾼이 갖춰야 할 모든 규범을 배웠다”고 훗날 회고한 것이다.
고 이 회장이 사업에 돈을 대기 시작한 것은 함흥물산 입사 6년 후인 21세 때였다. 25만원의 거금을 손에 쥐고 대양공사라는 식품도매상을 차려 20만평의 토지를 사들이는 게 그의 첫 사업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맨몸으로 서울로 단신월남하고 만다. 대부분의 재벌그룹 창업주들이 그렇듯 고 이 회장 역시 좌절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중고 자전거 한 대로 과자행상부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설탕과 밀가루 등을 취급하는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전국 체인망을 형성했다. 당시 1억원의 거금을 손에 쥐며 갑부소리를 듣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번째 좌절을 겪어야 했다.

세 번의 좌절, 세 번의 재기

부산 피난시절 다시 설탕도매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설탕왕’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시장을 석권하며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다. 이어 1956년 풍국제과를 인수, 드디어 어릴 적 꿈이었던 과자회사 주인이 되었다.
오늘날 동양의 기틀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배동환씨와 공동으로 삼척시멘트를 인수하고 1957년 독자경영에 나서면서부터다.
회사 간부들이 일제히 반대했던 삼척시멘트 인수에 대한 고 이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향후 국내 경제발전 전망으로 볼 때 시멘트공업이 절대로 유망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공장 주변에 석회석과 점토 등 시멘트의 원료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고 공장 옆엔 삼척화력발전소가 있어 동력원 확보도 용이했다. 게다가 수송을 위해 철로와 바다를 끼고 있는 삼척시멘트의 천혜의 입지가 그의 결의를 한층 강화시켰다.
시멘트라는 제품이 취급이 용이하고 생산도 비교적 단순하며 국가 기간산업으로써의 명분도 높다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 1억원에 인수했던 삼척시멘트는 회사 간부들의 예상대로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억원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결국 이병철·배동환 등 동업자들이 손을 떼고 고 이 회장은 그동안 축적된 전재산을 투입, 삼척시멘트 단독경영에 나섰다. 그래도 10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1971년 9월 고 이 회장은 회사보전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세 번째이면서도 마지막 좌절을 겪었다. 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할 형편이었고 세인의 온갖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일관된 정직과 신용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세 번의 좌절과 세 번의 재기, 그는 세 번째에서야 비소로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고 이 회장에게는 ‘점원서 출발한 자수성가의 표본’, ‘시멘트산업계의 거인’, ‘오리온성좌의 창업자’, ‘정직·근면의 한평생’, ‘동양철학자, 소크라테스 리’, ‘의리의 화신’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부인과의 드라마 같은 재회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과는 달리 가족은 늘 단촐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두 딸만을 두었다. 대부분의 재벌 창업주들이 그렇듯 아들을 낳아 기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없었던 것일까.
고 이 회장의 부인은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공군 군속으로 귀향한 고 이 회장은 “빨리 장가들어 효도해 달라”는 모친의 뜻에 따라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이 이사장과 약혼했다. 1·4 후퇴로 결혼식도 못 치루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사람은 이 이사장이 피난선으로 월남, 거제도에 머물다고 이 회장과 극적으로 만나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를 이 이사장은 ‘서남 이양구 추모집 동양보다 큰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4후퇴 때 회장님(고 이 회장)께서 군복을 구해와 가장하고 탈출하려고 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헤어졌지요. 그러다 그 이가 부산에 먼저 내려오셔서 승선자 명단을 입수하고…사촌 오라버니가 부산에 일보러 갔다가 그 양반을 만나 내가 거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제로 찾아오셔서 만났어요. 그래서 마산 진갑수(거래처)씨한테 가서 돈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지요. 숟가락 2개, 밥그릇 2개에 사과궤짝 놓고 신접살림 차렸어요. 당시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면서 국제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고 이 회장은 이 이사장의 미모에 반해 결혼했다는 말을 생전 자녀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순진한 면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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