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련 의혹 끊이지 않아
노태우 전 대통령 |
천병규 전 재무장관 |
송인상 효성그룹 고문 |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화려한 등장, 초라한 퇴장.’
신동방 오너 일가의 최근 근황에 대한 재계의 반응은 이 같은 표현으로 압축된다. ‘해표식용유’로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오른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한때 승승장구하며 재계의 부러움을 샀다. 각종 특혜설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치지형에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지 않은 채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했다. 대통령이었던 사돈이 권좌에서 물러난 지 불과 6년6개월만에 신동방은 부정과 비리의 온상기업으로 전락하며 오너 일가도 사돈처럼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이어받지 못한 창업주의 철학
신동방은 지난 1996년 사명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동방유량으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기업이었다. ‘해표식용유’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오너 일가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사돈’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창업주 고 신덕균 전 명예회장과 신명수 전 회장은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나 있었다.
신 전 회장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IMF 관리체제 초기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였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매일 각종 매스컴을 장식했다.
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신동방의 오너 일가가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신덕균 창업주의 생활신조가 큰 몫을 했다. 그의 아호는 ‘눌원(訥園)’.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訥園而敏於行)’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왔다. 아호에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신 창업주는 국내 대두가공업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해방전 정미업과 미곡유통을 했던 그는 아직 식품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1966년 동방유량을 설립하고 식용유 생산 및 사료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 사업 하나에 평생을 쏟으며 오로지 식품산업 한 길을 걸어왔다. 흔히 재벌을 향해 쏟아지는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난에서 신 창업주만큼은 예외였다.
식용유 및 대두박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신 창업주는 업종전문화로 승부수를 띄워 꾸준한 성장을 지속했다.
어려움 없었던 창업
이 같은 외고집 경영은 1989년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초기까지는 그대로 유지가 됐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IMF 관리체제를 앞두고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꾀하다 2년만에 워크아웃에 들어가 결국 올해초 채권단에 의해 CJ컨소시엄에 매각돼 오너 일가는 재계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다.
신 창업주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기 한 해 전인 1909년 경상남도 창원군 천가면 동선리(현재 부산광역시에 편입)에서 부친 신태규씨와 모친 조선이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태규씨는 집안의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에 따라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마치면서부터 선대에서부터 가업으로 전해내려온 수산업에 종사, 유복한 집안이었다.
유교적 가풍에 따라 유년시절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수업을 받은 신 창업주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범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어 서울의 경신고보에 진학, 유학생활을 하게 된 신 창업주는 이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독립심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당시 오산학교와 더불어 이북 출신 학생이 많고 진보적인 교육을 가르쳤던 경신고보에서 그는 춘원 이광수로부터 영어, 육당 최남선과 이선근으로부터 역사, 조선어학회 이사장 장지영으로부터 한글 철자법 등을 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한 신 창업주는 동경 유학시절 일본의 조선 수탈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졸업후 고향에서 민족자본 형성을 모색했다.
그리고 1년 후 마산항에 정박중인 일본 화물선을 지켜보다 곡물사업을 해보기로 결심을 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곡물거래를 겸한 정미업이 사업적으로 유망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정미소로 시작해 식용유로 성공
부친으로부터 결혼을 조건으로 사업자금을 받은 신 창업주는 친지의 중매로 1935년 경남 동래군 구포에서 정미업을 하던 재력가 김정환씨의 장녀 영자씨와 혼사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그의 일생에서 최초의 사업으로 정미소를 시작하게 된다. 현재 부산역 앞 텍사스 거리의 ‘태평정미소’가 그것이었다.
부친에게서 몸으로 배운 신용과 부지런함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태평정미소는 일이 많아졌고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세운 4~5년 뒤에는 부산지역에서 이름있는 청년사업가로 서서히 부상하게 됐다. 그 결과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부산정미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어 같은 시기에 곡물도매업 및 대규모 도정업과 수산업을 기초사업으로 오늘날 신동방의 모태가 된 동방흥업주식회사를 설립, 1963년에는 서울 진출과 함께 마포에 근대식 제분기를 설치하며 제분사업에도 본격 참여하게 된다.
식품 외길을 걸어온 신 창업주는 한때 철강업에 진출, 외도를 하기도 했다. 농림부 차관을 지내고 당대의 농정가였던 주석균씨로부터 동생인 주창균씨를 소개받은 게 계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 창업주는 철강사업에서 손을 떼고 만다. 철강사업 자체가 스스로 창안한 사업이 아닐뿐더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주씨를 도와주겠다는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씨의 자립기반이 어느 정도 생기면서 신 창업주는 과감하게 손을 떼고 식품산업만을 고집했다.
제분사업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던 신 창업주가 식용유지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64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민들 사이에서는 식용유라는 개념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유지를 식품가공의 기본 원료로 생각하기보다는 조미료의 일종으로 인식해 참깨와 들깨, 고추씨 등을 이용해 자가제조하거나 시장에서 파는 미강유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보다 전문적이고 위생적인 식용유를 생산, 판매하기로 작정한 신 창업주는 대전에 공장을 설립해 일본으로부터 반 연속 추출식 제유설비를 도입했다. 그리고 1966년 첫 제품을 생산했다. 오늘날 신동방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를 자랑하는 화려한 혼맥도
신 창업주의 자녀들은 자신과는 달리 대부분 연예결혼을 했다. 그리고 사돈들은 정관계 및 굴지의 재계 인사와 연결된 화려한 혼맥도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그룹총수와 전직 장관, 그리고 은행장 등이 등장한다.
먼저 신 창업주의 부인 김영자씨는 농림부 차관을 거쳐 대전피혁 회장과 효성기계공업 고문을 역임한 김종대씨의 누나다. 부산의 재력가 집안과 중매로 결혼한 것이다.
신 창업주의 자녀는 3남2녀로 장녀 현숙씨를 제외하면 모두 연애결혼을 했다.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현숙씨는 친지의 중매로 1959년 동방의료양행 회장인 남해용씨와 결혼했다. 해용씨는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졸업해 신 창업주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그의 부친은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한 남두현씨.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은 미국유학중 알게된 동양나이론 송인상 회장의 차녀 길자씨와 수년간의 연애 끝에 1968년 결혼했다. 신 전 회장은 1964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또 길자씨는 이화여대 음대 졸업 후 미국에서 첼로를 계속하다 신 전 회장을 만났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신 창업주 일가의 혼맥도는 이봉서 상공장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동서간이 됐다.
신 전 회장이 신동방에 입사한 것은 1967년. 신동방 설립 이듬해였다. 당초 기획실에 근무하며 진해공장 건설에 따른 제반 현안들을 입안하고 실무적으로 까다로운 업무들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년간 실무업무를 경험한 신 전 회장은 1974년 사장에 취임, 2세 경영인으로서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사 22년만인 1989년 신 창업주의 명예회장 취임과 함께 경영대권을 물려받았다.
신 전 회장은 취임 이후 곡물가공업을 전문분야로 동양 최고, 최대의 회사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감추지 않았다. 이는 부친과 같이 대기업의 전형적인 사업확장 방법인 문어발식 경영방식을 피하고 사업분야를 전문화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경영방법을 선택함으로써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겠다는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오래지 않아 이 같은 경영철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됨으로써 불행한 미래를 예고한다.
3세에 이르러 완성미 플러스
신 창업주의 차남 영수씨는 1970년 재무장관을 역임한 천병규씨의 1남3녀 가운데 셋째인 난주씨와 결혼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영수씨는 기업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현재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난주씨는 미국 워싱턴대학을 졸업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차녀 정숙씨는 지난 1980년대초 도미, 미국인 마이크 바세트씨와 결혼해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고려산업 회장으로 재직중인 3남 성수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남화진씨와 연애결혼했다. 화진씨의 부친은 재무차관을 역임한 뒤 중소기업은행장과 서울신탁은행장을 지낸 남상진씨. 성수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려산업에 입사, 경영자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신 창업주 일가의 화려한 혼맥도는 3세에 이르러 한층 그 빛을 발한다. 신 전 회장의 맏딸 정화씨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와 혼사를 치룬 게 대표적이다.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1987년 미팅에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만난 정화씨는 졸업을 앞둔 4학년 여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신 창업주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직계자녀들과 손녀에 이르는 3대의 혼사를 통해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정재계 인사들과 사돈을 맺어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신 창업주 자신의 결혼으로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가문을 통해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가, 동양나이론 회장인 송인가, 이봉서 전 상공장관의 부친인 전 국제화재 이필석 명예회장 가문, 전 내무장관 김치열가, 재무장관을 지낸 서봉균가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장녀 현숙씨를 통해 중앙일보를 창간한 홍진기가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가와 연결되고 차남 영수씨를 통해서는 법무장관을 역임한 오탁근가와 한 다리 건넌 사돈이 된다.
또 3남인 영수씨의 혼사로 1950년대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최정우가와 통하기도 한다.
손녀인 정화씨로는 노태우가와 연결되면서 SK그룹 최종현가와 김복동 전 국회의원 가문과 연결이 된다.
대통령의 사돈, 득이 아닌 해
그러나 화려한 정관계 인사와 재계 인사들을 사돈으로 두고 있는 신동방은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감으로써 기업은 살았지만 오너 일가는 퇴출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특히 대통령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특혜시비 속에 사업을 다각화했지만 결국은 사돈이 신동방의 몰락을 돕는 기이한 인연을 또 맺고 있다.
신 창업주에 이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신 전 회장은 식품전문기업으로서의 전문성을 포기한 채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92년 동방페레그린증권 설립을 시작으로 93년 해표유니레버 설립 등 증권, 유통, 외식, 화장품제조업 등에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 97년 대농그룹의 미도파에 인수를 시도하면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성원건설 등을 동원, 적대적 M&A에 나섰지만 전경련의 지원을 받은 대농의 방어로 실패하면서 급격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당시 신동방이 미도파와 대농 주식을 매집하는 데 쏟아부은 자금의 규모는 알려진 것만도 1천억원대, 우호세력까지 합하면 2천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막대한 주식매집 자금의 출처를 둘러싸고 비자금 의혹까지 불러진 가운데 결국 미도파 인수도 포기해야 했다.
이후 IMF 관리체제에 따른 고금리 소용돌이에 휘말려 1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신동방은 다시 회생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대한 특혜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증권업 진출이 대표적이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서울 소공동 서울센터 빌딩을 매입하고 테헤란로의 18층짜리 동남빌딩을 건축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99년 12월 신 전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및 업무상 배임, 증권거래법·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다.
결국 신동방은 채권단에 의해 지난해 8월 동원컨소시엄에 매각되는 듯 하다 올해초 CJ컨소시엄에 지분 56.28%가 매각됨으로써 신 창업주 일가는 신동방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target=_blank>alle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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